오늘 이사야서는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는 어떤 분이고,
그분과 함께 도래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희망에 차 노래합니다.
이사야서는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올바른 판결을 하시는 분으로
그리고 무뢰배와 악인은 가차 없이 처단하시는 분으로 얘기합니다.
이것은 메시아가 이 세상 임금들과는 정반대이신 분임을 얘기하는 겁니다.
오늘 이사야서에 의하면 이 세상 임금들은 올바른 판결을 하지 못하고
힘없고 가련한 이들에게 정당한 판결을 해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판결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실상 그렇습니다. 우리도 판단이나 판결의 시점에서
옳게 판단하지 못하고 옳게 판결하지 못하는 이유가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판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보이고 누구의 말이 들립니까?
멋있고 힘 있는 사람이 보이고 그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이렇게 판결자가 힘 있는 사람의 소리만 들어주니까
사람들이 다 힘을 소유하려고 하고 힘이 없으면
소리라도 큰 소리를 치거나 악다구니를 치게 되지요.
그러나 메시아는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들리는 대로 듣지 않습니다.
보는 것이 남에 의해 휘둘리지 않고 줏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는 것의 기준이 남에게 있지 않고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기준이 자기중심적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메시아는 자기중심적으로 보고 판결하지 않으시지요.
남에게 휘둘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자기중심적이지도 않는데
사랑이 기준이고 메시아에게 머무는 성령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성령으로 온갖 지혜와 경륜과 용맹과 지식을 갖추었기에
올바로 보고 가련한 이들에게 정당한 판결을 내려주고
무뢰배와 악인들은 가차 없이 처단하실 뿐 아니라
주님을 또한 경외하기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판결하십니다.
메시아가 주님을 두려워하니 그 백성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통령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면 그 국민들도 하느님을 두려워하듯
메시아가 주님을 두려워하면 그분의 통치를 받는 이들은
임금에서부터 촌부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두려워하겠지요.
그런데 이 두려움은 어떤 두려움입니까?
무서워 도망치게 하는 그런 두려움입니까?
아닙니다. 존경과 존중의 두려움이요, 섬기고 받드는 두려움입니다.
어제 미사 주례를 한 형제는 백부장의 태도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백부장의 태도는 친밀함과 두려움이 함께 있는 태도라고 말입니다.
살다보면 친밀하다고 막 대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사랑은 사랑일지라도 천박하다고 할 것입니다.
사랑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함부로 함이 없고
그를 존경하고 그의 자유를 존중하는 법이지요.
그리고 사랑이 위로 올라가 성령의 사랑에까지 도달하면
개인의 다양한 은사, 곧 다름을 존중하면서 또한 일치를 이룰 것이고,
그래서 마침내 늑대와 양이, 아이와 살모사가 어울리는 세상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