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 발토로메오 에스테반 뮤릴로(Bartholome Esteban Murillo: 1617- 1682)
크기 : 켄버스 유채 187X 228cm
소재지 :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세상에 많은 화가들이 성모자에 대한 작품을 남겼고 다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가 있으나 특히 사랑받는 작가로는 이태리 르네상스 화가인 라파엘로 산치오(Raphaelo Sanzio: 1483- 1520)이다.
그는 생에 많은 주제의 작품을 남겼으나 그중에 대종은 바로 성모자였으며, 중세 작가다운 많은 상징을 도입해서 의미성과 함께 더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의 활동 무대였던 세빌야는 많은 예술적 영감을 낳은 도시로, 유명한 오페라 칼멘과 세빌야의 이발사, 모쟐트의 돈 죠반니의 배경이 되며 가장 스페인적인 특성이 드러나는 것으로 평가되는 플라멩고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대적으로 약간 후대이긴 하나 스페인 출생의 이 작가는 종교화로서 걸작들을 많이 남기면서 특히 성모자에 있어서 스페인의 라파엘로로 불릴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작가였다.
14남매를 둔 다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소위 금수저 출신이라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여유롭고 균형 잡힌 인격자로 성장할 수 있었고, 나이가 들어 당시 명망 있는 집안의 딸과 결혼하여 11남매의 자녀를 얻고 행복한 부부생활을 했다.
회화에 남다른 관심이 있던 그는 세빌야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스승으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작가로서의 착실한 준비를 했다.
그는 당시 스페인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던 두 작가 프란체스코 쥬바란( Francesco zurbaran : 1598- 1664)과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Velazquez)로 부터 그들만의 장점을 배워 독자적인 화풍을 창출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밝고 화려한 바로크 화풍을 창출해서 종교화가 주고 있던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와는 다른 생명감과 기쁜 분위기를 창출했다.
이 장면은 성탄 사화의 가장 먼저 등장하는 목동들이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베틀레헴에서 탄생한 아기 예수를 만난 내용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 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세상에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사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천사들이 하늘로 떠나가자 목자들이 서로 말하였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 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루카 2: 8- 12 : 2: 15- 18)
오늘날 대부분의 성탄 말구유는 축제의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더 없이 화려하게 만들고 마태오 복음 2장에 나타나고 있는 동방박사의 방문까지 등장시켜 인간 사회의 축제 중 가장 화려하고 멋진 축제의 모습으로 만들고 있으나 ,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성탄의 모습은 참으로 안쓰럽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첫아들을 잉태한 젊은 부부가 해산할 자리를 찾지 못해 말구유에서 해산하고, 근처에 있던 당시 사회의 가장 천민 계급에 속하던 목동 몇 사람이 이 자리를 찾아 왔다는 초라하고 애잔스러운 모습이나 작가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이것을 구세주의 탄생으로 격상시켜 사람들에게 기쁜 감동을 줄 수 있는 분위기로 만들었다.
많은 종교적 주제의 작품을 제작한 작가는 종교적 주제를 그리기 이전에 자신의 신앙을 종교적 주제로 표현했다.
먼저 구도에 있어 작가는 말구유에 누운 예수님을 작품 중앙에 배치함으로서 그리스도야 말로 모든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말구유에 아기 예수를 눕힌 채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은 목동들과 함께 너무도 평온스러운 모습으로 있다.
첫 아들을 낳은 자리로서는 너무 초라한 말구유라는 것을 잊고 아들을 낳은 부모로서의 평온한 모습으로 지키고 있으며 그 곁에 여러 계층의 목자들 3명이 지키고 있다.
목자들은 아기 예수께서 세상 모든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젊은이, 중년, 노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당시 사회의 최하층민에 속하는 신분들이었으나, 아기 예수를 구세주로 알아본 첫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의 복장은 검박하면서도 단정하게 표현했다.
한마디로 이들은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사회적인 시각의 천민이 아니라 정신적인 귀족임을 강조했다.
작가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다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1베드로 2: 9)임을 전하기 위해 그들에게 품위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구세주를 경배하고 있는 그들의 벗은 발은 이들이 크리스챤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 덕목인 건강한 인간성을 표현하고 있다.
겸손(Humilitas)은 바로 흙(Humus)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이며 인간의 인간다움의 첫째가 바로 겸손임을 목동들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구세주의 영광스러운 면모와 목동들의 비참한 처지를 대비시킨 것이 아니라 목동들은 구세주의 품위를 닮은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해 요셉, 마리아의 모습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모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오른쪽 어떤 여인이 비둘기를 들고 아기 예수님께 나아가고 있는데, 이 비둘기는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내용에 대한 기억이며 구세주의 순결을 상징하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모세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한대로 재물을 바쳤다.”(루카 2: 22- 24)
작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오신 분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당시 여느 인간들이 치러야 할 율례에도 동참하심을 표현함으로서 그분 인간성에 대한 친근감을 더 하게 만들었다.
개는 충직함의 상징이며 항상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에 크리스챤들이 하느님께 보여야 할 충실성의 상징으로 드러나며 짐승들도 구세주를 찿아 와서 경배하듯이 우리들은 모두 구세주를 경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한 목자가 무릎을 꿇고 한손으로 어린 양을 만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명인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킬 희생양으로서 그분 사명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경쾌한 성탄 사화에서 탄생하신 그리스도의 사명을 암시함으로서 우리의 주님이신 그분을 향한 심원한 신앙에 눈뜨게 만들고 있다.
경쾌한 성탄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일생 사명에로 눈길을 돌리게 만들고 있다.
포대에 쌓인 아기 예수는 여느 어린이처럼 너무도 깨끗한 생명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작가는 이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전통적인 상징인 후광 보다 너무도 평범한 어린이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면서도, 성부의 사명을 세상에 완성해야 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하늘을 날고 있는 아기 천사들과의 교감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기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라는 인간 부모의 사랑 속에서도 하늘을 향한 시선을 두고 천사들을 바라보고 있으며 천사들은 그가 목동이 손을 짚고 있는 어린양으로서 십자가를 향한 인간을 구원할 분이심을 암시하고 있다.
즉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누워 있는 아기 예수의 시선을 통해 그가 해야 할 원대한 사명 즉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인류 구원이라는 사명을 강조하고 있다.
모두 아기 예수를 향해 시선을 두고 있는 것과 다르게 나귀 같은 짐승과 함께 있는 소의 시선은 관객을 향하고 있다.
작가는 중세기 성화에 사용하던 여러 상징들을 도입하는데 이 소는 바로 관객들을 말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께로 인도하는 호객 역할을 하게 만들고 있다.
유명한 성탄 성가 “남녀 교형내여 Adeste Fideles”의 가사처럼 “어서와 경배하세, 어서가 경배하세 어서가 우리 주께 경배하세”라는 가사를 연상시키면서 관객들에게 목동들처럼 구유 앞에 무릎 꿇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소 앞에는 베게와 밀짚모자 같은 것이 널부러져 있는데, 그리스도 성탄 사건의 일상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성탄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크리스챤들이 일상 삶 안에서 체험하고 전해야 할 것임을 알리는 것이다.
이 작품 앞에 선 관객들은 예수 성탄이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까지도 자기들의 삶의 현장에서 체험해야 할 사건임을 일깨우고 있다.
작가는 학업을 위해 잠시 마드리드에 머문 것을 제외하고 일생을 고향인 세빌야에 머물면서 종교화가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성과 함께 성모자 어린이 소년들을 모델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그의 모든 작품에는 수준 높은 종교성과 인간미를 표현해서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준 인기 작가로서 일생을 지냈다.
그는 당시 스페인이 반종교개혁의 진원지로서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이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며, 순수하면서도 열렬한 그의 신앙 표현으로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의 작품은 자연스럽게 신앙을 담아내어 신앙의 내용을 일상 삶에서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교리교육의 좋은 재료가 되게 만들었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건강한 종교성 때문에 생전에 많은 작품 주문을 받을 수 있었고 사회적인 인정을 받던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모이면서 인간적으로도 성공한 행복한 작가로서의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