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오늘 주님과 제자들의 대화는 산에서 내려오며 하는 얘깁니다.
곧, 주님의 변모를 보이신 타볼산에서 내려오면서 거기서 주님과
얘기를 같이 나눴던 분들 중에서 엘리야에 대해 얘기하는 겁니다.
이 얘기 중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함에 대해 제자들이 얘기하자
주님께서는 이미 와 있는데도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미 와 있는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사람들 뿐 아니라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뒤의 얘기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저는 여기서 이런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타볼산에서는 메시아이신 주님과 예언자 엘리야를 봤는데
산에서 내려오자 주님과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는 현상 말입니다.
산 위에서는 주님과 예언자를 보지만 세상 가운데서는 못 보고,
기도 중에는 보지만 세상을 사는 중에는 못 보는 현상,
이것이 우리가 흔히 보는 우리의 현상이 아닐까요?
사실 세상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서 하느님을 보기 힘듭니다.
아니, 세상을 살면서 하느님을 보는 것은
영의 눈을 가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우리에게 해주는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 말입니다.
그는 세상일을 할 때에 이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라고 하였지요.
“주님이 일하는 은총을 주신 형제들은 충실하고 헌신적으로 일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심지어 신학을 공부할 때에도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라 하였지요.
“안토니오 형제, 신학연구로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으면
그대가 신학을 가르치는 일은 나의 마음에 듭니다.”
일할 때는 물론이고 신학을 연구할 때도 기도와 헌신의 영이 꺼져 있으면
하느님을 연구하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에 하느님은 안 계시지요.
다시 말해서 신학을 연구하면서도 하느님을 보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기도와 헌신의 영과 관련하여
<끄다>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불을 켜고 끄는 개념으로 이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불이 켜지면 보이고 꺼지면 보이지 않듯이
기도와 헌신의 영이 꺼지면 주님이 오셔서 앞에 계셔도 볼 수 없고
기도와 헌신이 영이 켜지면 와 계신 주님을 볼 수 있다는 얘기지요.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와 헌신의 영이 꺼지지 않도록 깨어 지키는 것이 아닐까요?
대림절에 기도한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홀대하지 않기 위해서
기도와 헌신의 영을 계속 불타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와 계신 주님을 알아보기 위해서도,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기 위해서도 우리는
기도와 헌신의 영이 꺼지지 않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이 대림시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