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잘 아시다시피 대림 제 3 주일은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오늘 전례의 독서와 기도들이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도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례의 시기를 잘 따르는 신앙인이라면 우리도
기뻐해야 하고 적어도 슬프거나 우울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서 저는 돌아보고 생각게 됩니다.
나는 기쁜가?
기쁘다면 왜 기쁘고 무엇으로 기쁜가?
기쁘지 않다면 어떻게 하면 기쁠 수 있을까?
우선 나는 기쁜지, 눈을 뜨면 새로운 하루가 기쁜지 돌아봤습니다.
팔짝팔짝 뛸 만큼 기쁜 일이 있는지, 아니라면 잔잔한 기쁨이라도 있는지.
그런데 솔직히 저의 지금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공동체 막내 형제가 취직한 것 외에는 그렇게 크게 기쁜 일도 없었고
제가 계속 기도해드리던 분이 며칠 전 돌아가신 것 외에는 큰 슬픔도 없는,
그런 무덤덤한 나날인 것 같습니다.
이런 저에 비해 그저께 만난 어르신은 정말로 기쁨에 차 계셨습니다.
구순 잔치 때 못 가 대신 수도원에 모셔서 미사와 식사를 같이 했는데
이빨이 하나도 없으셔서 유동식밖에 못 드시고 몇 년 전 교통사고로
상처까지 하시어 기쁘거나 즐거울 것이 하나도 없으실 것 같은 분이
그렇게 기쁘게 사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어르신에게서 느낀 것은 기쁜 일이 있어서 기쁜 것이 아니라
기쁜 일을 만드셔서 기쁘신 것이었습니다.
아주 지혜로우시게도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을 궁리하시고는
당신으로 인해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거였습니다.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94세까지 살아야 할 이유와 계획을
가지고 계실 정도로 당신 인생에 대한 사랑과 사랑 의지가 있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을 만나고 어제 내내 생각한 것은 이런 사랑과 사랑의지가
어떻게 그분께는 있고 저에게는 없을까? 그것이었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사랑이 있고 사랑의지도 있지만 충만의 차이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가르침에 따르면 성령의 충만이냐 아니냐의 문제였습니다.
오늘 이사야서는 “주 하느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영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가난한 이들이란 마음이 부서지고, 잡혀가고, 갇힌 것 때문에
기쁨이 없는 자들이지요.
실로 돈이 없고, 힘이 없고, 명예가 없는 사람보다
사랑이 없고, 그래서 기쁨이 없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고, 반대로
아무 것 없지만 성령으로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테살로니카서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했어도 성령의 불을 우리가 끌 수 있다는 얘깁니다.
성령의 불은 안 꺼질 것 같은데 우리가 성령의 불을 끌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아! 성령의 불이 꺼질 수 있다니! 그것도 우리에 의해서! 그렇다면 어떻게?
제 생각에 성령의 기쁨이 아닌 유사 기쁨에 의해서 꺼질 것 같습니다.
오늘 독서들과 화답송은 다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함”을 얘기하는데
주님이 아닌 세상 것들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는 순간 불은 꺼지겠지요.
그런데 우리에 의해 불이 꺼진다면 우리에 의해 불은 지속될 것입니다.
세상 쾌락과 기쁨을 삼가고 기도로 기도와 헌신의 영을 지피는 겁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기도임을 묵상하는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