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의 주님은 오늘 모세를 통해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그리고 이어지는 축복은 <주께서-주시리라.>의 반복입니다.
아시다시피 감사는 지난 은총이나 은혜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에 비해 축복은 미래의 은총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축복은 이미 주신 은총 주실 은총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새 해 첫날인 오늘 민수기의 축복을
새해의 축복으로 바꾸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올해도 너에게 복 주시리라.
주님께서 올해도 너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올해도 너에게 얼굴을 비추시리라.
주님께서 올해도 너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올해도 너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런데 저는 <올해도>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작년에도 주셨는데 올해도 주시리라는 거지요.
그러므로 작년의 은총에 감사하는 사람만이
올해의 은총도 믿고 축복도 감사하게 받을 것이기에
저나 여러분이나 올해도 축복을 감사하게 받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받지 않을 사람이 있다는 겁니까?
제 생각에 감사하게 받는 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입니다.
하나는 청원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의 차원입니다.
청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고 그래서 갈망의 사람입니다.
없으니까 달라는 것이고 필요하니까 달라는 것이기에
가난하면 할수록 필요하면 할수록 그 청하는 것이 주어졌을 때 감사하고,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축복도 겸허하고 감사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반면 배부른 사람은 축복을 청하지 않고 주셔도 감사하지 않을 겁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행복하려 하지 않고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자기 힘으로 이뤄 행복하려는 사람과
자기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축복을 감사하게 받는 두 번째 차원은 믿음의 차원입니다.
저는 자주 우리의 믿음이 완전하다면 청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하느님께나 사람에게 뭣을 청한다는 것은 믿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완전하고 확고하면 그럴수록 청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안 주시기에 청하고
자비를 베푸시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까?
자비롭지 않은 분이 어찌 자비를 달란다고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 얘기는 갈망의 표시로 청하는 것은 좋지만
믿음의 차원에서는 청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고
그러므로 그저 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축복에 대해서 감사하면 됩니다.
이것이 5천명에게 빵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실 때
주님께서 감사의 기도를 미리 바치고 빵을 나누어주신 것의 뜻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우리는 받고 난 뒤에야 다시 말해서
내 통장에 입금이 된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감사를 하지만
주님은 주실 것을 믿으시기에 청하지 않고 미리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오늘 새해 첫날을 우리는 천주의 모친 마리아의 축일로 지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믿으셨기에 복된 분이라고 엘리사벳은 칭송하는데
마리아가 뭘 믿으셨다는 것입니까?
건강이나 재물과 성공과 같은 것을 주시리라 믿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을 주시리라는 것을 믿으신 것인데
축복을 받는 마리아가 아니라 축성을 받은 마리아가 되는 겁니다.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글구 신부님 강론으로 힘을 얻는 누군가 있음이오니 ~~힘네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