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요르단 강물에 들어가신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과 정확히 같습니다.
강물에 들어가신 것이고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지요.
그리고 들어감과 들어옴은 나감과 반대되는 뜻이지요.
성탄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고,
세례로 죄의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범죄의 소굴로 들어가시고
교도소 안으로 들어가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교도소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주님은 교도소 안으로 들어가신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가 밖으로 나오도록 주님은 안으로 들어가신 겁니다.
그러니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역동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이 교도소 안으로 들어오시어 우리와 같은 죄인이 되시는 역동과
그 다음으로 우리도 주님과 같아져 주님과 함께 밖으로 나오는 역동입니다.
그러니까 성탄이나 세례나 같아짐이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우리는 두 가지로 같아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같아짐으로 우리도 주님과 같아지는 것이며
같아지게 하려고 주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계시는 것이기에
우리도 같아지기 위해서 주님과 같이 있어야 합니다.
같아짐과 같이 있음의 신비가 세례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물의 세례의 의미라면 불의 세례의 의미도 있습니다.
물의 세례의 의미가 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불의 세례의 의미는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불에서 구해내기 위해 불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요.
얼마 전 우리는 큰 불로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고
2층에서 구조를 요청했는데 구조대가 들어가지 않아
희생자가 많이 생겼다고 비판하는 소리도 큽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는 한 남자가 불속에 뛰어들어
노인을 구조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아무리 소방대원이라도 불속에 뛰어드는 것은 두렵고
실제로 그렇게 뛰어들었다가 숨진 소방대원들이 참으로 많기에
우리가 목숨을 걸고 불속에 뛰어든 사람은 칭찬할 수는 있어도
불속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쉽게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물의 세례는 죄를 씻는 정화의 세례라면
불의 세례는 자신이 죽어 남을 구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세례,
불타는 사랑의 세례요 성령의 세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불의 세례가 더 완전하고 더 우리가 살아야 할 성사지요.
그러나 불의 세례를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먼저 불의 세례, 성령의 세례를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그 불과 성령의 세례를 언제 어떻게 받게 될지는 모른다는 건데
사도들이 오순절에 받은 것과 같을 방식임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자기들의 세속의 꿈이 완전히 깨어지고 난 뒤에,
다시 말해서 허무 뒤에 성령이 오셨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성령의 세례는 어쩌면 허무의 세례라고 할 수 있고,
허무가 부정적으로 여겨져 굳이 구분하길 원하신다면
영적 허무의 세례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아무튼 그래서 허무를 주십사 청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미친 짓이거나 지나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