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무엘기는 전쟁에 패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느끼는 낭패감과
그러는 가운데 살기 위해 수를 쓰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얄팍함을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어찌하여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우리를 치셨을까?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옵시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원수들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합시다.”
그런데 앞의 얘기를 모르고 이 말만 놓고 보면 자기들이 전쟁에 진 것이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치셨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제법 신앙인답습니다.
왜냐면 신앙이 없는 백성이었다면 전쟁의 패인을
자기들이 잘못 싸웠기 때문이라고 하거나 반대로
필리스티인이 잘 싸웠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하느님을 생각지 않은 그들이었지만
전쟁 상황에서는 하느님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기로 작정을 합니다.
우리도 종종 그러지요. 좋을 때는 하느님 상관없이 살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느님의 힘을 빌리려고 미사도 드리고 기도도 하지요.
그리고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내 편이 되어 주실 거라고
기대하기도 하고 믿기도 합니다.
그런데 웬걸 이런 기대와 믿음에 어긋나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더 참패를 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전쟁에서의 참패와 희생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뺏긴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하느님을 뺏기는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고 그래서 하느님의 선의,
곧 내가 원하는 좋은 것을 주실 원의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이 너무도 서운하고 원망스러워
이런 하느님은 이제 믿지 않겠다고 쫓아내고
그리하여 우리도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하느님을 원수들에게 뺏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를 보며 반성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병환자처럼 하느님의 사랑과 선의를 믿었는지,
아니면 믿지는 않고 기대만 한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사실 기대는 쉬어도 믿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려면
나의 내적인 상태를 잘 식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선의에 대한 나의 기대가 좌절됐을 때
진정 얄팍한 신앙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성장을 하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사랑과 선의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더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선의로 악을 주실 수 있고
선의로 악을 주시기도 하는 분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편식을 하거나 안 좋은 것을 원하는 아이가 자기 입맛대로 주기를 바라지만
사랑 깊은 엄마는 결코 아이가 원하는 대로 줄 수가 없고 주지 않는 것처럼
엄마보다도 사랑이 더 크시고 더 좋은 뜻을 가지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얼마든지 주시고 원치 않는 것은 결코 주지 않으시지요.
그러니 오늘 우리도 나변환자처럼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에
모든 것을 맡기며 이렇게 소리 내어 믿음을 고백해봅시다.
“스승님,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