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스승-제자의 관계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당연한 것이지만 제자들, 곧 엘리의 제자 사무엘과
요한의 제자인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는 아직 하느님을 모릅니다.
이에 대해 사무엘기는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고 설명하고,
복음은 요한이 알려주자 그제야 제자들이 알게 된 맥락을 전합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아직 하느님을 모르지만 알아가는 과정 중에 있으며
이 과정에 스승들의 역할이 있는 것인데 우리도 한 때는 제자였고
이제는 스승의 역할도 해야 하기에 오늘 우리는 둘 다 보겠습니다.
먼저 제자로서의 나를 보겠습니다.
제자란 모르는 사람이지만 알고 싶은 사람이고 그래서 배우려는 사람이지요.
그러므로 모르는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배우고 싶지도 않은 사람은
제자가 될 수 없고 그래서 제자도 아니고 스승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란 모르는지를 아는 사람인데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사실은 아는 것이고
알지만 잘 모르기에 더 알고 싶은 것이며
더 알고 싶기에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모른다고 할 때 우리는 벌써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 대해 얘기를 듣기 전에는
제가 그 나라를 모르는 것조차 몰랐는데 그 나라 얘기를 듣고는
그 나라를 처음 알게 됐고 조금 알고 나니 흥미가 생겨
아직 많이 모르는 나라를 더 알고 싶어 배우게 되는 거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에게 하느님을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잘 모르면서도 잘 안다고 깝죽거리는 것이고 부끄러운 것이고,
(마치 누구와 수인사 한 번 한 정도 가지고 잘 안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가장 부끄러운 것은 하느님께 대한 흥미도 알고 싶은 것도 없는 것이며
반대로 가장 필요한 것도 하느님을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열망이지요.
다음으로 스승으로서의 나에 대해서 보겠는데 무엇보다도 우리는
가당치 않게 내가 무슨 스승이냐고 사랑 없는 겸손을 떨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을 잘 모르는 것 사실이고 그래서 아직도 배워야 할 제자지만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는 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사람, 곧 스승이 되어야 하는데 다음과 같은 스승이어야 합니다.
먼저 스승은 다른 사람보다 먼저 하느님을 보는 사람, 선견자여야 합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
예수님께서는 그저 지나가셨고 그래서 제자들을 비롯하여 모두 몰라봤지만
요한은 알아봤는데 요한만 주님을 알아본 것은 우연히 알아본 것이 아니라
이제나저제나 만나 뵙기를 바라고 기다리던 사람이 눈여겨 본 결과입니다.
다음으로 스승은 요한처럼 주님을 가리키는 제시자여야 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스승은 자기가 먼저 본 하느님을 이제 제자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지식을 알려주지 않고 존재를 알려줍니다.
<보라!>고 하지 <알아들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을 직접 보지 않고 얘기만 듣고 알 수도 있는데
하느님은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나 뵙고 아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스승은 제자를 주님께 이끄는 사람, 곧 인도자여야 합니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이는 택배기사가 물건을 가로채면 안 되듯 제자를 나의 제자로 삼지 않고,
때가 되면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고 하느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사랑하는 이를 종종 내 사람으로 잡아두려고 하는데
그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 곧 애착일 뿐임을
깊이 성찰하며 인도자로서의 우리 역할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