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 하셨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을 부르시어 열둘을 사도로 삼으시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표현이 마음에 걸립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마음에 걸리는 이유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그렇다면 주님께서 원치 않는 사람도 있다는 말인가?
다른 하나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원하신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의문이 생기지만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은
당신의 제자이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누구나 당신의 제자이기를 원하실 것이고,
그러기에 능력이 없다고 제자이기를 원치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이기에 제자이기를 원치 않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 생각에 심지어 죄인일지라도 제자가 되기를 바라실 겁니다.
사실 열두 사도로 뽑힌 사람 중에는
주님께 칭찬을 받은 나타나엘밖에는
그렇게 뛰어난 사람도 없으며
오히려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이나
나중에 주님을 배반할 사람이나
혁명당원 시몬처럼 과격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원하신 사람은 열두 사도였습니다.
제자는 누구나 되기를 원하셨고
제자 되는데 어떤 자격을 갖추는 것도 원치 않으셨지만
원하신 것은 열두 사도이고 원하신 열두 사도조차도
자격을 갖춘 사람이기를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열두 사도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대표라는 뜻이고,
열두 지파는 완전한 공동체의 뜻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이 완전해서 완전한 공동체가 아니라
빠진 사람이 없어서 완전한 공동체이며
능력 없다고 빼고 죄인이라고 배제하는,
그런 배제가 없기에 완전한 공동체라는 뜻이지요.
빠지지도 않고 빼지도 않는 공동체가 사실 완전한 공동체입니다.
능력중심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무결점의 공동체가 아니라 포용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무죄함의 공동체가 아니라 너그러운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희가 사는 공동체는 셋이 사는 공동체입니다.
저희 하나하나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셋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그것이 불완전하고 그래서
셋에서 하나도 빼거나 빠지지 않아 셋을 온전히 이루고,
삼위일체를 이루는 공동체이면 완전한 공동체입니다.
마침내 저희 공동체는 오늘 축복식을 합니다.
말하자면 집들이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저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공동체임을 성찰하고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아름다운 삼위일체의 공동체가 더욱 빛을 발하시기를 기도드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