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들은 디모테오서는 오늘 축일을 지내는 디모테오와
바오로 사도의 관계에 대해 얘기합니다.
디모테오는 오늘 같이 축일을 지내는 티토와 함께 바오로에게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랑과 신뢰를 받는 각별한 존재이고
그래서 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축일 다음날 축일을 지내는 것이겠지요.
이 축일을 지내며 우리의 관계를 돌아보고 본받으라는 뜻이기도 하고요.
우선 디모테오와 바오로는 대단한 신뢰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신뢰 관계는 인간적인 신뢰 관계가 아닙니다.
인간적인 신뢰 관계는 나를 믿어주고 적어도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서로 생각이 될 때 형성되는 관계지요.
그러나 바오로와 디모테오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나누는 신뢰 관계입니다.
너도 하느님을 믿고 나도 하느님을 믿는 데서 오는 신뢰 관계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신뢰 관계이지요.
그런데 인간을 믿는 사람, 아니
인간을 믿으려는 사람은 그리 믿을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그것은 믿을만한 존재가 아닌 인간을 믿으려 하기에
똑같이 믿을만한 존재가 아닌 겁니다.
감언이설에 잘 속는 얕은 믿음의 소유자는 믿어서는 안 되지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야 그 믿음의 뿌리가 깊어서
그 믿음이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고 그래서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매일 귀에 대고 해야지 그 사랑을 믿는 사람은
사랑에 대한 믿음이 약한 사람이고 하느님 사랑은 더더욱 믿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을 하시지 굳이 말로 사랑을 대신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디모테오와 바오로 사이의 관계에서
신뢰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쩌면 은사를 나누는 관계이고
하느님 믿음에 대한 서로의 신뢰가 있기에 은사도 나누는 관계지요.
그래서 오늘 서간을 보면 디모테오의 믿음이 얼마나 훌륭한지 얘기한 다음
자기의 안수로 하느님께 은사를 받았음을 바오로 사도는 얘기합니다.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이,
이제는 그대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은사는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것이지만 안수를 통해서 받는다는 점입니다.
개신교가 가톨릭의 성사를 대체로 부정하고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직접 받지 사람을 통해서 받는 것을 부정하는 편이지만
목사직은 목사의 안수를 통해 받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하느님의 은사를 우리는 안수로 나누는 관계입니다.
목사직이나 사제직과 같이 직무를 주는 안수는
교회의 권위자들이 해주면서 직무를 수행할 은사를 빌어주지만
병의 치유나 성령의 은사를 북돋아 주는 안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를 사는 신앙인이라면
서로를 통해 성령의 은사를 받는 사람들이어야 하고,
성령의 은사를 불태우도록 서로가 서로를 북돋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은사를 사는 사람이고
그중에서도 프란치스칸 은사를 사는 사람이라면
같은 프란치스칸 은사를 사는 사람끼리 관계적으로 은사를 살아야 합니다.
은사란 본래 내가 받은 은총 중에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도록 받은 것이니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사람은 무엇보다도 공동체를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고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은사를 공동체를 위해 써야 하지요.
이러하도록 서로 북돋워주는 것이 우리의 프란치스칸 형제애임을
다시 한 번 성찰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