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생애 말년에 다시 한 번 큰 잘못을 범합니다.
유혹에 넘어간 것인데 그 유혹자가 하느님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기는 2절부터인데 1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인구조사를 하라고 다윗을 부추기시고
그래서 다윗은 인구조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틀림없이 하느님이 우리를 유혹을 하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 텐데 사무엘기는 분명
하느님께서 다윗을 부추기셨다고 하고,
그 이유가 이스라엘에 진노하셨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인들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부추기시며 말씀하셨다.”
그런데 하느님은 진정 인간으로 하여금 잘못을 범하도록 유혹하시고
벌을 주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나서 유혹하신 걸까요?
그런 것은 물론 아닐 것이고, 이미 이스라엘과 다윗 안에
죄가 들어와 있거나 적어도 자체유혹이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부추긴다는 것의 뜻이 본래 그런 것이 아닌가요?
어떤 마음이 이미 있는데 그것을 부추긴 것이고,
할까 말까 망설일 때 하라고 부추기는 것이지요.
할 생각이 전혀 없는데 하자고 하는 것은 꼬드기는 것이고
할 생각이 있지만 그걸 실행을 못할 때 하자하는 것이 부추기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다윗은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겁니까?
자기들이 이룬 것을, 승리를, 국력을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시오.
내가 백성의 수를 알고자 하오.”
저도 이런 면에서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정현이라는 테니스 선수가 잘하여 성적을 내자 평소 테니스 경기를
잘 보지 않았음에도 그의 중계에 관심을 갖고 보는 것입니다.
얼마 전 아는 분들과 어느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는데
마침 그 경기가 생중계되는 거였고 식사 중 결례인 줄 알면서도
자꾸 눈이 그리로 갈뿐 아니라 그 후에도 그 경기를 또 보는 거였습니다.
또 제가 인터넷에 올린 강론을 얼마나 봤는지 확인치 않겠다고 하면서도
읽은 분들의 수를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자체유혹 또는 내부유혹이라고 하는 겁니다.
누가 알아보라는 외부유혹이 있기 전에 이미 내가 알고 싶은 것이
제 안에 있는데 그것이 자체유혹 또는 내부유혹인 것이고,
그래서 이 자체유혹 때문에 부추김이 있건 없건 알아보게 된다는 거지요.
그런데 나의 성취와 성공을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왜 문제입니까?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는 것이기에 문제라는 것입니까?
그런 인간적인 측면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신 것을 자기의 성취와 성공으로 갈취하는 거지요.
그래도 다윗이 대단한 것은 즉시 자기의 잘못을 깨달은 것이고,
벌을 받더라도 인간에게 맡기기보다 하느님께 의탁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이런 짓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괴롭기 그지없구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
저는 이런 다윗을 보면서 저에게도, 여러분에게 이렇게 얘기하고픕니다.
그래, 다윗도 이런 잘못을 범하였으니 우리도 그럴 수 있지만
아니, 더 자주 그리고 더 큰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만
과거의 죄에 머물지 말고 다윗처럼 빨리 잘못을 깨닫고
하느님 자비에 우리 죄를 맡기며 봉헌키로 오늘 다시 마음을 잡읍시다.
삶속에서 늘 원하지 않아도 잘못을 행하게 되는 저에게 다윗과 같이 잘못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길 하느님께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