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들은 디모테오서의 말씀은 저로 하여금
저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그 부르심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신앙인인 이유는
우리 자신을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는 신앙이 없는 사람과 달리 우리 생명의 탄생이
하느님의 첫 번째 부르심이고 근본적인 부르심임을 믿습니다.
자기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어미아비가 나를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며,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태어나게 하신 것이고
뜻이 있으셔서 나를 태어나게 하신 거라고 믿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뜻이 무엇입니까?
지난 번 종신서약 피정 준비 피정 때 지는 피정자들에게
왜 사시냐고, 왜 재속 프란치스칸이 되려고 하느냐고 물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왜 사는지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이라는 대답이 대다수였으며
몇 분은 하느님께서 태어나게 하셔서 태어났다고 신앙적으로 답하셨습니다.
그렇게 대부분 답을 못하셨지만 나중에 제가 누구나 다
행복을 위해 사는 거 아니냐고 말씀드리니 모두 맞다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에게는 행복이지만 행복의 다른 말이
우리 신앙인에게는 구원이고, 구원이란 하느님 안에서의 삶이며,
그러니 우리의 부르심은 하느님 안에서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지요.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태어난 모든 사람의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부르심이라면
특별한 일이나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분들도 있습니다.
곧 바오로 사도가 자신에 대해 얘기하듯 사도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사도란 다른 사람의 행복과 구원에 이바지하도록 부르심 받은 자로서
그 사명을 수행하도록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이런 은사를 상기시키며 이렇게 격려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에게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상황이 좋지 않고 그래서 사도직을 수행하기에 힘이 들기 때문일 겁니다.
죄수가 되어야 하고 고난에 참여해야 하는 상황이니 힘이 들지요.
우리 신앙인들은 사도의 직을 마다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다만 힘들기 때문에 또는 사도직으로 인한 어려움 때문에 마다합니다.
그러므로 힘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 힘을 우리가 지닐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힘이 없다면 빠져나갔기 때이고 스스로 채우지 못하기 때문이니
힘을 받아야 하는데 누구에게서 어떻게 힘을 받을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아주 분명하게 안수를 통해 영을 받으라고 합니다.
성령은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힘들다는 타령만 하고 성령을 힘입으려 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또한 복음 선포의 능력, 복음을 위해 어떤 고난도 견뎌낼 힘은 청하지 않고
그저 육신의 힘과 세상에서 행세나 하게 할 힘이나
요즘과 같은 선거철에 권력을 주십사 청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이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면
자기비하, 교만.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 대신에 자존감으로 하루하루를 !
감사합니다
말씀 속에 성령의 활동이 느껴지는 오늘입니다.
오늘 현충일에 이나라를 사랑하여 몸바친 모든이의 영혼들의 전구로 평화통일과 모든 백성들의 복되고 건강한 삶이 주님안에 이루어지기를 기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