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 말씀을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과 베일제불'이라는 제목과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제목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즉 이야기 2개가 같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마태오와 마르코, 루카
세 복음서 모두에 등장하지만,
마르코에서만 연결되어 나타날 뿐,
마태오와 루카에서는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코에서 볼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신 이유가
더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부분에 나타난 표현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소문이 나서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에 이어 이제는 급기야
어머니와 형제들까지 사건의 진위를 알고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것은
성령의 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행위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그 행위를 반대하다보니,
성령에 의한 것을 마귀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에 의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성령을 모독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행위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대해 의심을 품다보니,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루에도 여러 번 하는 기도 중의 하나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뜻이 이땅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잘 모릅니다.
나를 통해서,
혹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아니면 다른 피조물을 통해서,
아니면 하느님 스스로 직접적으로
그 뜻이 이루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일텐데,
우리는 그 결과를 통해 얻어지는 것에
더 집중하곤 합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면,
그것을 질투하곤 합니다.
그래서 급기야 그 사람을 반대하기도 합니다.
또한 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행위를 온전히 지지해주거나
힘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의심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나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려고 할 때,
우리는 비록 나 스스로 그 열매는 맺을 수 없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어,
그 열매를 나누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또한,
내 안에서 맺어진 열매를
다른 사람과도 나눌 수 있습니다.
질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져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더 좋게 보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조금 넓게 볼 수 있다면,
우리가 같은 형제 자매로
그 열매를 함께 나누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열매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과정에
조금은 더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