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오늘 연중 제 11 주일의 주제는 처음에는 작지만
나중에는 커지는 하느님의 나라이고
하느님께서 그렇게 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를 읽다가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는 말씀이 전에 없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이라!
꼭대기 순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고 왜 주님은 꼭대기 순을 따 심으실까?
언젠가 가뭄이 심하니 큰 나무의 꼭대기 이파리들부터 마르더군요.
뿌리에서 물을 그 꼭대기까지 보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꼭대기 순이란 뿌리에서 가장 먼 그래서
가장 생명 가능성은 작고 죽을 위험성은 큰 것일 겁니다.
지금 저는 글라라 수녀원에 와 있는데 어제 의자를 갖고 밖으로 나와
나무들을 보며 오늘 복음을 묵상하였습니다.
큰 나무일수록 수많은 가지들과 이파리들이 있는데
내가 그 많은 이파리들에게 물을 다 보내려면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과
그 수많은 이파리들에게 수액을 보내는 나무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지만 가물어 이파리들이 죽어가고 나도 어쩔 수 없어 할 때가 있는데
그때도 하느님은 그 꼭대기 말라죽을 순을 가지고 생명을 살리실 수 있고,
또 그리 하시겠다고 오늘 예언서를 통해 말씀하시는데
저는 불현 듯 제가 향백나무 꼭대기 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죽을 가능성이 큰 것도 살리실 수 있고,
작은 씨앗을 가지고도 큰 나무로 키우실 수 있고, 키우시겠다고 하시며
겨자씨의 비유를 드십니다.
그런데 실은 겨자씨만 작은 것이 아니고 모든 씨앗은 다 작으며
어느 나무나 다 작은 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허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씨앗을 다 키우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욕심의 씨앗은 인간이 뿌리고 인간이 자라게 하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의 씨앗만 하느님께서 크게 자라게 하십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세상 욕심의 씨앗도 능력에 따라 어느 정도 인간이 자라게 할 수 있지만
아무리 능력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그 끝은 허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수하여 망하거나 능력이 다하고 목숨이 다해 허무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너와 나의 욕심이 맞아 떨어지면 욕심대로 되는 것 같지만
서로 욕심을 챙기다보면 자라는듯하다가 이내 망하게 되기도 하지요.
욕망의 끝은 항상 허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하느님께서 자라게 하시기에
어느 씨앗보다 작아도 어느 나무보다 크게 자라고
어떤 환경에서도 죽지 않고 크게 자랍니다.
그래서 이 나무에는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세상 욕심의 씨앗은 나무가 하늘로 자라지 않고 땅을 길뿐 아니라
욕심의 두더지 같은 것들만 몰려들어 뿌리째 파먹어 시들어버리지만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하늘로 자라고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들이 깃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인 것 같은데 실은 자기 욕심에서 나온 일들과
하느님의 공동체 같은데 실은 욕망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많은 일들과 많은 교회들이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자기들의 일과 교회를 크게 해주실 거라고 믿고 또 그렇게 선전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비록 시작은 작지만 곧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하고,
우리 교회가 지금은 비록 작지만 곧 큰 교회가 될 것이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작은 씨앗은
작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큰 것을 욕심내는 작은 교회가 아니라
작은 것에 실망하지 않고 작은 것을 사랑하는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과 우리 공동체를 볼 것입니다.
우리의 나무는 어떤 나무이고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는지 두더지들이 들끓는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