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들어가십니다.
그곳에는 마귀 들린 사람 둘이 살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지방으로 발을 디디시자 마주 옵니다.
자기들을 쫓아내실 것을 알면서도 마주 나오는 것을 보면 아주 대담합니다.
뭡니까? 환영하러 나오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고
그리고 쫓겨날 텐데 왜 마주나옵니까?
그 지역이 자기 구역인데 예수님께서 침범하셨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구역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하고 싶지만
그렇게 예수님께서 물러나실 기세가 아니시니 돼지 안에서라도
자기 구역에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애걸하러 나온 것이겠지요.
그런데 오늘 마태오복음에는 다른 공관복음과 달리
“때가 되기도 전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귀는 자기 구역을 매우 집착하여 떠나지 않으려는 존재인데
공간적으로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자기의 시간이 있어서
그 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이 세상에 머물고자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때가 주님이 오셔야 할 적당한 때입니까?
자기가 생각한 때는 언제였던 것입니까?
가끔 나이 먹어 돌아가신 분을 보고 천수天壽를 누렸다고 합니다.
수명壽命이라는 말이 있고 천수와 같은 뜻으로 천명天命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들 안에는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이 하늘의 명命 또는 명령命令에
달렸다는 인생철학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이것까지, 그러니까 인간의 수명이 천명에 달렸다는 것까지는 좋은데
왜 꼭 오래 살아야지만 천수 또는 천명을 누렸다고 하는 것입니까?
몇 살까지 살면 천수를 누린 것이고 몇 살까지면 천명을 못 누린 겁니까?
우리 신앙인에게 분명한 것은 내가 희망하는 때가 천수의 때가 아니고,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라고 명령하시는 때가 천수의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신앙인으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아니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으니 마음에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은
천명이 세상을 떠나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늘로 오라는 명령이고,
인격적으로 얘기하면 친구와 친지를 떠나 하느님께 오라는 초댑니다.
그러니까 악령들은 이 초대가 싫었던 건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며칠 전 제 친구신부가 주님의 초대로 우리를 떠났을 때
나도 곧 그 초대에 기꺼이 응할 수 있을지 생각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같이 살던 친구와 친지들은 친밀하고
하느님은 아직 낯설어서 아직 기껍지 않은 것은 아닌가?
막상 그 초대를 받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은 하나
기꺼이는 아니고 담담히 받아들일 것 같은 현재의 생각입니다.
이런 저이니 당신과 제가 무슨 상관이 있냐고,
저를 괴롭히려오셨냐고 말하지 않는 것만으로
나는 오늘의 마귀 들린 사람과는 다르다고 위안 삼아야 할까요?
이런저런 생각에 찹찹한 그러나 차분한 오늘입니다.
하느님의 때가 지금 '여기'라고 여기며
오늘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