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오늘은 왠지 복음을 읽으면서 <가까이 부르시는 주님>이
마음에 다가와 꽂혔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파견하시는 주님과 파견 받는 저의 관계에
더 집중을 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것도 파견하기 위해서이니
주님과 저의 관계에서 파견에 더 집중하는 것이 당연타할 수도 있겠지만
주님 부르심의 또 하나의 이유이고 어쩌면 파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주님께 다가가 주님과 함께 있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동작이 이어지겠습니다.
다가감-함께 머묾-나아감.
우리는 먼저 다가가야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가가야 한다고 밋밋하게 얘기하고
당연히 다가갈 것처럼 생각 없이 얘기할 수도 있지만
좀 더 진지하게랄까 아니면 신랄하게 얘기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매일 기도하고 미사 드리고
입버릇처럼 매일 하느님과 주님을 되뇌고 하니
이미 그리고 늘 주님과 함께 있다고 안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까요?
함께 있긴 한데 딴 생각이나 하고 딴 곳을 보면 어떻게 되지요?
아니, 같이 있기는 합니까?
사실 우리가 다가간다고 하는 것은 떨어져 있다는 얘기지요.
주님과 우리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비록 얼마간이라도.
우리가 주님과 공간적으로 함께 또는 가까이 있다는 것은 별 의미 없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니 말입니다.
거리는 마음의 거리이고, 가까움은 갈망의 가까움입니다.
우리가 늘 같이 살면서도 마음의 거리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고,
늘 보지만 애틋함이 없이 소 닭 보듯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공기처럼 늘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이신데
우리가 마치 공기가 부족한 사람처럼 헐떡여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나 생각 없이 편히 숨을 쉬다가도
자주 또는 간혹 숨을 느끼고 숨 쉬는 것도 느끼며
한 숨을 깊이 쉴 수는 있지요. 심호흡이라고 하는 것 말입니다.
이 심호흡을 그러나 우리는 기도라고도 하고 성령호흡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심호흡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그리고 가슴을 펴고 발걸음을 떼듯
우리는 기도 안에서 이 성령호흡을 하고 주님의 파견 받아 나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온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전에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먼저 가라고 하시네요.
그러니까 나와는 가까이 있는 사람 그러나
주님과는 멀어져 있는 사람들한테 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멀리 외국을 생각할 것 없이
내 주변 사람들을 살펴봐야겠습니다.
어쩌면 내 집안의 내 남편과 내 자식이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이겠습니다.
저의 위선이 보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