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아시다시피 루카복음의 행복선언은 마태오복음의 것과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어떤 것이 주님의 행복선언에 더 가까운지 모르지만
우리는 지금 성서학 공부를 하자는 것이 아니니
루카복음서의 가르침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성찰하면 될 것입니다.
우선 루카복음은 마태오복음과 달리 불행선언이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굳이 불행선언을 따로 할 필요가 있을까?
마태오복음처럼 행복선언만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동적으로 불행하다는 것이 될 텐데.
그런데 루카복음은 그렇게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불행선언을 따로 또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요즘 제 주변의 사람들을 봅니다.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 참으로 많은데
이런 사람에게 우리는 두 가지 권고를 합니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라는 것과 건강에 해로운 것 하지 말라는 것.
그런데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라고 하는 것이 마태오복음적이라면
건강에 안 좋은 것 하지 말라고도 하는 것이 루카복음적입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고,
먹는 것도 안 좋은 것만 골라서 먹는 것 같아 제가 보기에 안타깝습니다.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해도 그렇게 먹으면
지금 당장은 행복해도 병날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저도 술을 먹고 아주 짜게 먹어 말할 자격이 없으면서도
그런 것 먹지 말라고, 먹으면 이리저리 안 좋다고 충고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라는 것 이전에
건강에 나쁜 것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우선이고, 더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루카복음도 마찬가지여서, 불행해지라는 저주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도
이렇게 불행선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같은 이유입니다.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 놔두고 행복해질 것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루카복음이 얘기하는 바,
우리를 불행케 하는 바로 그것은 무엇입니까?
루카복음에는 “지금”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똑같이 지금 가난하고 지금 부유한데
지금 부유한 경우는 완료형의 지금입니다.
완료형의 행복은 불행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루카복음은 이미 위로를 받았다고 얘기합니다.
“불행하여라,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미래와 영원과 이어지는 지금이 있고,
미래와 영원과 이어지지 않는 지금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쾌락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건 일단 지금 맛있는 것 먹고 보자는 겁니다.
심리학에서 이런 테스트를 합니다.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이 있는데 두 가지를 다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을 먼저 먹는지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 사람은 미성숙하거나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덜 건강하거나 병약합니다.
어린애는 입에 쓴 약은 뱉고 입에 단 사탕은 먹어 나중에 이빨이 빠지지요.
나는 어쩔 것인가?
영원으로 이어지는 지금을 살 것인가,
당장의 쾌락이나 즐거움을 쫓는 지금을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