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오늘 과부의 외아들을 되살리신 얘기는
과부와 외아들에게 베풀어진 구원 사건으로만 볼 수 있고,
불쌍한 과부이니 구원을 베푸심은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들의 구원을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보고 의미를 새겨야 할 사건입니다.
왜냐면 외아들을 잃은 과부는 너무 불쌍하니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남편도 있고 여러 자식 중의 하나가 죽은 어미의 경우는
그래도 덜 불쌍하기에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하느님은 보편적인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실 뿐 아니라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구원에서마저 배제되는,
더 큰 비 구원의 고통과 불행을 겪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외아들을 살리시면서 그것이 모자에게 구원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실은 그 모자뿐 아니라 그것을 본 사람이나 들어 알게 된 모든 사람에게도
구원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병을 고쳐주고 죽음에서 살려준 사람만 구원하신 것이고,
병과 죽음에서 구해주지 않으신 사람은 구원해주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를 뒤집어 얘기하면 병과 죽음에서 구해주신 것도 구원이 될 수 있고,
구해주지 않으신 것도 구원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병의 치유가 곧 영혼의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병의 치유가 영혼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병이 치유되었어도 병만 치유되었을 뿐
영혼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어떤 환자가 죽게 되었는데 좋은 의사를 만나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를 죽을 때까지 고마워하며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가 살아난 대가로 돈을 주고는 그 이상의 고마움도 없고,
더 이상의 관계로 이어가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마찬가지 경우가 하느님의 치유의 경우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이 치유되었어도 병만 나았을 뿐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병이 치유되지 않아 죽게 되지만 그래서
세상의 복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영원의 복 주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다시 말하지만 병의 치유가 구원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구원이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것은
다른 많은 불쌍한 사람을 놔두고 그들만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사건현장에 같이 있었고 같이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처럼
다른 모든 사람도 구원을 체험케 되기를 바라시며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2천 년이 지나 이 복음을 읽는 우리도
구원받은 과부와 아들을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복음이 묘사하는 그런 사람들처럼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하고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과부와 외아들만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 백성 모두, 그러니까 우리 모두를 찾아오셨다고 믿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우리가 오늘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