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과 가족을 잃을 때까지는 그 큰 고통에도 고통을 받아들이며
하느님께 원망하지 않던 욥이 자신의 몸에 종기가 나니 마침내
하느님께 병 주신 것에 대해 원망하고 태어난 날도 저주합니다.
내가 건강하고 자식이 아플 때는 차라리 내가 아프게 해달라고
보통 부모들이 주님께 기도하기도 하지만 내 몸에 닥친 고통은
견디지 못하는 것이 보통의 인간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 인간은 결국 자신을 제일 사랑하는 거라고,
자기 몸이 아프면 자식도 뭐도 없는 거라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그런 부모도 있지만 다른 측면이랄까 다른 차원이 있는 겁니다.
사랑으로는 대신 아플 수 있고 죽기까지 할 수 있지만
사랑이 작동하지 않으면 고통을 감수할 수도 없고
우리의 인내심과 인내력이 고갈되어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욥은 감내하지 못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는데
이때 친구들이 찾아와 고통을 당하는 욥을 위로하기보다는
하느님을 변호하며 죄를 뉘우치고 자비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욥은 자기가 잘못한 것이 뭐냐고 친구들에게 반발을 합니다.
허나 오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 할 수 있는 어디 있냐고 합니다.
“물론 나도 그런 줄은 알고 있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그러니까 오락가락하는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욥은 하느님께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 반발하는 걸 겁니다.
우리도 종종 그러하지요.
반박할 수 없는 어른이 잘못을 지적하면 잘못을 인정하는데
나보다 더 잘못이 많은 사람이 지적하거나 친구가 지적하면
비록 잘못했어도 내가 잘못한 게 뭐냐고 반발하게 되지요.
너보다 낫다는 것이며 너한테는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거지요.
그리고 이때 우리가 가지게 되는 감정이 있습니다.
나보다 더 잘못이 많으면서도 의인인양 훈계하는 친구에게는 화가 나고,
그런 친구는 고통이 없는데 오히려 의로운 자기가 고통 받는 것 때문에
하느님께 대해서는 억울합니다.
그래서 욥기의 또 다른 주제는 죄와 벌 사이의 불공정성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내가 죄인임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끽소리 않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면 선한 내가 왜 고통을 받고
나보다 더 죄 많은 사람은 떵떵거리고 사느냐고 의문을 제기케 되는데
욥기는 이런 문제에 답을 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사실 착한 사람이 고통을 더 받고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더 받는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착한 사람은 남을 아프게 하면 몇 배 자신이 더 아프지만
악한 사람은 악한/나쁜 짓을 하고도 별로 괴롭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악한 짓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악덕기업가나 싸이코 패스 환자와 같은 경우는
다른 사람을 죽이면서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고통 받는 것을 볼 때 희열을 느끼기에 나쁜 짓을 합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은 고통을 주고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으며,
착한 사람은 더 고통스럽고 악한 사람은 고통을 느끼지 않지만
고통을 받지 않는다고 악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며 반대로
고통을 받고 고통스럽다고 착한 사람이 불행한 것이 아니지요.
고통이 곧 불행이 아니고 고통 없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
사랑이 없고 하느님이 없는 것이 불행이라는 것, 그러기에
고통스러워도 하느님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믿고
착한 것 때문에 더 고통 받아도 억울해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신앙임을
착한 욥 그러나 고통 받는 욥 때문에 깨닫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