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독서 안에서 바오로 사도는 끈질기게 율법주의를 공격합니다.
공격의 골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율법주의를 반대하셨는데
율법으로 아직도 의롭게 되려한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여러분은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기고 은총에서 떨어져나간 사람.
이런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선
깜짝 놀라고 끔찍한 일인데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신분증은 그리스도교 주민등록증인데
정체성은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연으로 치면 끈 떨어진 연이
사람의 손에서 떨어져나가 어디로 날아가 버릴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나가
그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꼭 붙어 있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떨어지지 말고 꼭 따라가야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법을 따르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법을 따라가면 어디로 갑니까?
바오로 사도는 아주 분명하게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이끌어야 하는 계명이
나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로마 7, 10)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가 주님께 시비를 걸듯 정결례에 집착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어지고 은총과 사랑을 놓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끝으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여기서 세 가지 의미 있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랑’, ‘행동’, ‘믿음’
그런데 우리는 흔히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의 은총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강조하지 사랑의 행위,
그러니까 믿음의 실천은 야고보서가 강조하고
바오로 사도는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지요.
그리고 대체로 바오로 서간을 더 선호하는 개신교는
그래서 ‘오직 은총’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얘기하고,
이에 비해 천주교는 개신교보다는 실천도 강조하고,
야고보서에 대한 거부감이 개신교에 비해 많지 않다고 얘기하곤 하지요.
그런데 오늘 보면 바오로 사도도 사랑을 강조하며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천되지 않는 믿음은 사실 믿음이 아니며,
실천을 하더라도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이라야 참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의 공로와 업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지만
더 완전하고 더 올바른 믿음은 실천되어지는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실천은 공로를 쌓기 위한 실천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로서의 실천이요, 은총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실천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고 그래서 그 사랑을 받았으며
그래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라고 가르침 받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