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어제 복음의 베드로처럼 깝죽대고 앞서 나가서 걸림돌이 되지 말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길잡이는 주님이시지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뒤따름을 생각하니 여러 가지 모습이 떠오릅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꼭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옛적 어머니들이 아버지 뒤를 따라가는 모습입니다.
꼭 좋은 모습이 아니라 함은 女必從夫의 뜻도 있기 때문인데,
저는 제가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묵묵히 뒤따르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이 젊었을 때는 멋있어 보였고
기질적으로도 그런 것이 있는데,
사실은 천박합니다.
다음은 등산을 할 때나 행진을 할 때
선두의 뒤를 따라 가는 모습입니다.
맨 앞을 가는 사람은
행로를 잡고
속도를 조절하고
떠나는 것과 쉬는 것을 정해야 하는 신경 씀, 번거로움이 있지만
뒤 따르는 사람은 그런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따라 가면 됩니다.
어떤 경우는 그저 앞 사람 발자국을 따라가기만 해도 됩니다.
그래도 뒤따름은
따름의 겸손한 정신이 없으면,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수난 의지가 없으면 쉽지 않습니다.
행로를 어떻게 잡어도,
속도가 따라가기 힘들어도,
쉬고 싶은데도 쉬지 않고, 떠나기 싫은데 떠날지라도
불평불만이 없을뿐더러 어째도 좋아야 합니다.
다음은 성인들이 주님을 뒤따르는 모습입니다.
이번에 프란치스코의 글을 우리말로 새로 번역하면서
프란치스코가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해석 없이 뒤따르려했는지
새삼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는데
프란치스코의 이 얘기를 더 하고 싶지만
오늘은 성 도미니코 축일이기에 도미니코 성인의 뒤따름을 묵상합니다.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는 동시대의 인물이고
탁발 영성을 같이 열어간 선구자들이었고
수도회를 합치자는 얘기가 있었기에
프란치스코는 도미니코회의 공동의 사부이고
도미니코는 프란치스코회의 공동의 사부입니다.
두 성인이 살던 시대는 오늘 날도 그렇긴 하지만
주님의 말씀이 두 가지로 폭행을 당하던 시기였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들에 의한 폭행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말씀을 제 멋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한 폭행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아예 따르지 않는 것도 문제였지만
이단들처럼 자기 멋대로 주님 말씀을 해석하는 것도 큰 문제였습니다.
도미니코 성인은 이단들을 거슬러 주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던 사람들에 비해
이단들은 주님의 말씀을 글자그대로 열심히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을 독선적으로 따르는 것이었고
편협하게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만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른다는 독선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배제함으로 사랑의 주님 말씀을 폭행하였고,
어느 한 말씀만을 선택하고 집중함으로 보편적인 하느님의 말씀을
독점하고 왜곡하는 폭행을 저질렀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좁은 자기 所見에 갇힐 수 없다는 겸손과
주님의 말씀을 자기만 사랑케 할 수 없다는 사랑이
주님의 말씀을 옳게 뒤따르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임을 도미니코 성인은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어제 복음의 베드로처럼 깝죽대고 앞서 나가서 걸림돌이 되지 말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길잡이는 주님이시지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뒤따름을 생각하니 여러 가지 모습이 떠오릅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꼭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옛적 어머니들이 아버지 뒤를 따라가는 모습입니다.
꼭 좋은 모습이 아니라 함은 女必從夫의 뜻도 있기 때문인데,
저는 제가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묵묵히 뒤따르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이 젊었을 때는 멋있어 보였고
기질적으로도 그런 것이 있는데,
사실은 천박합니다.
다음은 등산을 할 때나 행진을 할 때
선두의 뒤를 따라 가는 모습입니다.
맨 앞을 가는 사람은
행로를 잡고
속도를 조절하고
떠나는 것과 쉬는 것을 정해야 하는 신경 씀, 번거로움이 있지만
뒤 따르는 사람은 그런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따라 가면 됩니다.
어떤 경우는 그저 앞 사람 발자국을 따라가기만 해도 됩니다.
그래도 뒤따름은
따름의 겸손한 정신이 없으면,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수난 의지가 없으면 쉽지 않습니다.
행로를 어떻게 잡어도,
속도가 따라가기 힘들어도,
쉬고 싶은데도 쉬지 않고, 떠나기 싫은데 떠날지라도
불평불만이 없을뿐더러 어째도 좋아야 합니다.
다음은 성인들이 주님을 뒤따르는 모습입니다.
이번에 프란치스코의 글을 우리말로 새로 번역하면서
프란치스코가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해석 없이 뒤따르려했는지
새삼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는데
프란치스코의 이 얘기를 더 하고 싶지만
오늘은 성 도미니코 축일이기에 도미니코 성인의 뒤따름을 묵상합니다.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는 동시대의 인물이고
탁발 영성을 같이 열어간 선구자들이었고
수도회를 합치자는 얘기가 있었기에
프란치스코는 도미니코회의 공동의 사부이고
도미니코는 프란치스코회의 공동의 사부입니다.
두 성인이 살던 시대는 오늘 날도 그렇긴 하지만
주님의 말씀이 두 가지로 폭행을 당하던 시기였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들에 의한 폭행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말씀을 제 멋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한 폭행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아예 따르지 않는 것도 문제였지만
이단들처럼 자기 멋대로 주님 말씀을 해석하는 것도 큰 문제였습니다.
도미니코 성인은 이단들을 거슬러 주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던 사람들에 비해
이단들은 주님의 말씀을 글자그대로 열심히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을 독선적으로 따르는 것이었고
편협하게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만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른다는 독선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배제함으로 사랑의 주님 말씀을 폭행하였고,
어느 한 말씀만을 선택하고 집중함으로 보편적인 하느님의 말씀을
독점하고 왜곡하는 폭행을 저질렀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좁은 자기 所見에 갇힐 수 없다는 겸손과
주님의 말씀을 자기만 사랑케 할 수 없다는 사랑이
주님의 말씀을 옳게 뒤따르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임을 도미니코 성인은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