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첫 번째로 생각이 떠올라 중얼거린 것이
‘주님마저도 큰이 작은이 운운하실 게 뭐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 큰이 작은이를 많이 따지고,
그렇게 눈치를 보다가 큰 사람한테 줄을 서려고 하는데
주님마저 크고 작은 것을 말씀하시고 그것도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작은 사람을 말씀하시니 마땅치 않은 거였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작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저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고,
굳이 따진다면 하느님 앞에서 다 작은 자로 있는 거지
크고 작은 것을 따지는 것이 있고 서열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인물이 없다거나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크다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라는 한 개인의 크고 작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이 증거 하는 하늘나라를 이 세상과 비교하는 말씀일 겁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대단하고 가치 있는 거라 할지라도
하늘나라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무가치한 거라는 말씀이지요.
그런데도 하늘나라는 이 세상에서 무가치한 것처럼 무시당하고,
하늘나라를 증거 하는 세례자 요한과 이전의 예언자들이
이 세상 사람들 특히 권력자들에 의해 박해와 폭행을 당했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그런다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사실 하늘나라가 이 세상 그 누구에 의해 폭행을 당한다고 망하겠습니까?
망하는 것은 이 세상이고 망할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이지요.
그러므로 하늘나라를 살려고 하는 사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그러므로 만일 두려워한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흥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내가 폭행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늘나라 폭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설마 내가 하늘나라의 폭행자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단독범행이 아닌 경우 주범과 공범이 있고,
적극 가담자와 소극 가담자가 있고 경우에 따라 방관자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우리 중에는 적극적인 하늘나라 폭행자는 없고,
소극 가담자나 방관자는 있고, 자기도 모르게 폭행하는 사람은 있을 겁니다.
주님이 오셨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저 이 세상에 빠져 산다면,
하늘나라를 이 세상보다 저 평가하고, 그래서
주님을 따르기보다 권력자나 세상 풍조를 따른다면,
하느님의 자녀를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 한다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이런 것들이 소극적이지만 우리가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과 함께 하늘나라의 행복을 선물로 가지고 오셨는데
그 행복을 원치 않고 세상이 주는 행복에 안주하는 것도 이 대림절에
우리가 하늘나라 폭행죄를 반성하는데 있어서 빼먹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 을 같이 묵상합니다.
눈 쌓인 하얀 산 속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