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대 사람들을 철부지 아이에 비유하십니다.
우리말에서 철부지는 ‘철’+‘부지’일 것입니다.
여기서 ‘철’은 봄철 가을철처럼 때를 나타내는 뜻일 수 있고,
아직 철이 나지 않았다고 할 때처럼
아직 사리분별의 지혜가 생기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으며,
‘부지’는 한자어 ‘不知’, 곧 ‘알지 못함’이라는 뜻일 겁니다.
사실 지혜란 사리분별을 잘하는 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피아彼我, 곧 나와 남의 분간을 잘 하고,
피차彼此, 곧 이것과 저것을 잘 고려하고 배려하며,
사리事理, 곧 일이 돌아가는 이치를 잘 알고 그에 맞게 처신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철이 들지 않아 사리분별을 잘 할 줄 모르면
철부지 어린이가 흔히 그러하듯 어른이 되어서도
온통 자기중심적이고 그래서 완전히 자기밖에 모릅니다.
자기중심이고 자기밖에 모르면 어떻게 합니까?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라고 하고,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주장대로 하라고 하며,
모두가 다 자기 마음에 들게 하라하고, 자기 마음에 들라고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해河海와 같이 넓은 것이 아니라
밴댕이소갈딱지 같이 좁아서 아무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는데
오늘 철부지 아이들처럼 왜 내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투정합니다.
어제는 주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폭행한 당시 사람들이
곧 당신도 폭행함으로써 하늘나라를 폭행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오늘은 철부지 아이 같은 당대 사람들이 요한은 노상 굶으니
너무 부담을 준다고 투정을 하고 주님은 노상 먹고 마시시니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정을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폭행은 힘이 있는 어른이 하고
투정은 힘이 없는 아이가 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를 기준으로 보면 같습니다.
둘 다 자기중심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요구하기에
하늘나라답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요구하는 것이 있을 때
폭력으로 그것을 끝까지 관철하려는 것이 폭행이고,
감정표출로 그것을 끝까지 이루려는 것이 투정입니다.
주님께서 복음의 다른 곳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철부지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늘 아이 또는 하늘스런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오늘 이사야서는 아쉬움을 진하게 토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 아이처럼 착하였다면
다시 말해서 주님의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평화와 정의가 강물처럼 넘실거렸을 거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분간天地分揀을 못하고
모든 것이 제 세상인 줄 아는 철부지가 아니라
하늘 높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께는 영광을 드리고 그래서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가 내리게 하는 주님처럼
그렇게 착한 하늘 아이가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네. 그렇게 다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