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저의 사랑 경험에서 인간을 사랑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간혹 하느님은 사랑하면서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하느님을 정말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이비 종교나 광신집단에서 간혹 가족을 다 팽개치고 그리고
모든 재산을 다 갖다 바치면서까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러기에 우리는 그런 종교를 사이비 종교라고 하고,
그런 하느님 사랑을 온전한 하느님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하느님 사랑은 효자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를 정말로 사랑하고 더 나아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아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사랑하는 다른 아들,
그러니까 자기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지만 어렸을 때 아버지가 너무 그리워
아버지의 유품 중에 유일하게 남은 야전잠바를 엘리아의 겉옷을
엘리사가 엘리아의 영인 듯 소중히 하듯 저도 그것을 그렇게
애지중지하였고 제가 30 대까지 입고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야전잠바는 거지도 받지 않을 정도로 허름한 거지만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사랑했기에 소중했던 거였지요.
그러니 하느님을 아버지로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기 형제를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는데
형제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그 사람들,
곧 사회의 최하층과 최약자들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주님은 두 방향의 행보를 하십니다.
수직과 수평의 두 방향으로 행보를 하시는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도 아래로의 행보를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상선약수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제가 너무도 좋아하고 그래서
이번 성탄 강론에서도 얘기한 바가 있는데 노자는 도덕경에서
상선, 곧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고 얘기하지요.
그런데 신앙인인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자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상류층에 머물지 않고 물처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 가운데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묵상을 할 때마다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래로 내려가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지만
더 근본적인 반성은 제가 물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래로 내려가려고 애를 쓰지 물처럼 자연스럽게 내려가지 않습니다.
자연스럽지 않고 인위적으로 내려가려한다는 것은 제가 존재적으로
물과 같지 않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제가 참사랑의 존재가 아닌 겁니다.
다음으로 주님은 수평적인 행보, 곧 찾아가시는 행보도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립의 삶, 혼족, 혼밥, 혼술의 삶을 살고 있는 요즘은
내려가는 것보다 어쩌면 다가가는 것이 더 필요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고
내려가는 것보다 다가가는 것이 제게는 더 큰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공생활 내내 이렇게 소외된 이들을 찾아 나그네 삶을 사실 터인데
이 또한 순례자와 나그네 영성을 살아야 할 저를 반성케 하는 오늘입니다.
인사하며 안부도 나누는 저가되도록 일 깨워주심에 갈사드리며
그리도도록 노력할 것을 결심해봅니다.
고 결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