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오늘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이 말씀 중에서 ‘예수님께서는’을 빼고
어떤 성인이 이렇게 했다는 걸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도 자주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 흘리며 탄원했는데
예수님이 아니라 프란치스코가 이렇게 한 걸로 하는 편이 낫겠다는 겁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 이어지는 말씀, 곧 고난을 겪음으로써
순종하는 것을 배웠다는 것은 주님께 해당되는 말씀이라기보다는
우리 인간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니 말이 됩니까?
우리 같이 악하고 고집 센 인간이라야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것이지
착하신 주님께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그렇습니다.
이런 기도나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거지만
착하신 주님이시기에 우리와 똑같이 이렇게 하셨고
그것은 우리의 본보기로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착하신 주님이시기에 아버지께 순종하여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이고 똑같은 인간이기에 우리와 똑같이 겟세마니에서는
고난을 면하게 해달라고 애원하시고 그러나 당신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하면서 고통에서도 순종하는 법을 배우신 겁니다.
고통을 통해 고통에서 순종하는 법,
주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배우신 것이고
주님을 본받아야 할 우리도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이론이 아니라 사랑하면서 배워야 하듯
고통에서 순종하는 것도 고통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저와 같이 고통에 대한 강의나 고통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강의를
아무리 많이 하고 잘 하는 사람이라도 실제로 고통을 겪은 사람보다
고통에서 순종을 더 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일생 건강한 편이기에 육신의 고통도 많지 않았고,
관구장을 하면서 마음고생을 좀 했지만 그 외에는 큰 고통 없고 행복했기에
나중에 어디 조금 아프게 되고 어려움이 생기면 평생 아파왔던 분들이나
가족들 특히 자녀들 때문에 근심걱정이 떠나지 않는 분들보다 더 고통에
순종치 못할 것이 틀림없기에 지금부터 각오도 하고 기도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관상 기도에 대해 생각할 때 이런 생각을 특히 더 많이 합니다.
스님들이 좌선하듯 자세를 옳게 잡고 호흡을 잘 하는 것을 마치
관상 또는 관상 기도를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착각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편안할 때 관상 기도를 많이 했어도
막상 고통이 닥치니 온 존재가 흔들리고 그때 하느님을 볼 수 없다면
그런 관상 기도는 헛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편안할 때가 아니라
고통 중에서 하느님을 관상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그래서 고통 중에서 순종하는 것을 아는 것이 최고의 관상법입니다.
그렇습니다.
고통 한 가운데 있을 때도 고통만 보지 않고 하느님을 보고,
그 고통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래서
마침내 고통을 주신 하느님 뜻을 알게 되고 순종케 되는 것이
주님 사랑을 알고 사랑케 되는 것만큼이나 우리 신앙인이
죽을 때가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님처럼 배우려는 마음과 배우는 자세를 주십사고 청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