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집회서를 가지고 묵상을 하렵니다.
그래서 지혜시리즈를 이어 가려고 하는데
오늘 지혜에 대한 가르침이 으스스합니다.
지혜는 가시밭길을 걷게 하고 두려움과 공포를 몰고 온다니 말입니다.
“지혜는 처음에 그와 더불어 가시밭길을 걷고
그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몰고 오리라.”
연애를 할 때 남자들이 여자를 꼬시며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 있지요.
나하고 결혼하면 손에 물을 안 묻히게 해주겠다.
나하고 결혼하면 꽃길만 걷게 해주겠다.
이래야 꾐에 홀딱 넘어가 결혼할 텐데
나하고 결혼하면 가시밭길을 가게 하겠다고 하면 결혼할 여자 있겠습니까?
그런 남자가 있으면 바보겠지요.
그런데 반대로 꽃길만 걷게 해주겠다는 남자의 말을 믿고
홀딱 넘어가면 그 여자는 어떻습니까?
정말로 믿는다면 그런 여자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집회서는 지혜의 아들, 그러니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지혜를 신뢰하는 사람, 지혜에 순종하는 사람에 대해 얘기하며
처음에는 가시밭길을 걷게 하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지혜는 처음에 그와 더불어 가시밭길을 걷고”
그런데 집회서는 이어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또 합니다.
“지혜는 그를 신뢰할 때까지 자신의 규율로 그를 단련시키고
자신의 바른 규범으로 그를 시험하리라.”
그러니까 지혜의 아들, 지혜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을
지혜가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 단련시키고 시험하겠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지혜를 신뢰할 때까지 단련시키고 시험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지혜가 그를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 단련시키고 시험하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제가 느끼는 것은 지혜와 지혜의 아들의 관계는
앞서 얘기한 연인의 관계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며
스승은 제자가 단련과 시험에 통과할 때까지 그러니까 됐다고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단련을 멈추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에 비해 지혜의 아들은 꽃길을 가게 하겠다는 자를 믿지 않고
가시밭길로 인도하여 자신을 단련시키는 분을 지혜의 스승으로 삼는데
지혜가 처음에 자기 아들, 자기 제자를 가시밭길로 데려가 걷게 할 때
그가 그것을 단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시련으로만 생각했다면
스승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을 거고
지혜를 사랑하고 신뢰하며 순종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당신은 지혜이시나이다.”고 얘기하듯
주님이 바로 지혜 자체이시고 우리의 참 스승이십니다.
그래서 지혜이시고 참 스승이신 주님은 우리를 꽃길로 꾀지 않고,
처음부터 가시밭길, 십자가 길을 당신을 믿고 따라오라고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이것을 시련으로만 생각하고 단련으로 믿지 못하는
사람은 떨어져나갈 것이고 그것을 믿는 사람만 따라나설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부르심과 따름에 대해서 같은 것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을 따르겠다고 나서자 탑을 쌓기 전에 그리고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먼저 앉아서 자기가 가진 것으로
쌓을 수 있을지, 이길 수 있을지 계산하고 시작하듯 잘 생각하고 따르라고.
그러니까 시련은 우리를 지혜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단련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지혜의 아들이 될 만한 사람인지,
지혜의 아들로 충분히 성장했는지 식별하는 시험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시련을 단련이라고 믿는 것이 지혜요,
그런 주님을 믿고 가시밭길, 십자가길을 따라나서는 사람이
참으로 제자요 지혜로운 자임을 묵상하고 깨닫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