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치기稚氣가 강했을 때 그래서 너무 자신만만하게 얘기하곤 했던 것이
‘하느님과 여자를 어떻게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느냐?’고 하면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하곤 했지요.
내가 우습게 여기는 사람과 내가 비교를 당할 때 우리는 종종
‘그 사람이 어떻게 나와 비교대상이 되느냐?’고 하면서 기분 나빠하는데
사람 사이에서도 이런 비교불가가 있다면
하느님과 우리 인간은 더더욱 비교불가고,
하느님과 다른 것을 같이 놓고 선택을 고민하는 것도 말이 안 되겠지요.
이치적으로 이것이 여전히 맞고 그래서 비록 치기가 강했어도
옛날의 저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지만 요즘 와서 그렇지 않은 현실들,
그러니까 저의 현실과 다른 분들의 현실을 겸손하게 인정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놔두고 세상을 따라가지 말아야 함은 물론이고,
하느님과 세상을 놓고 무엇을 선택할까 고민도 하지 말아야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생각과 달리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을 선택하곤 합니다.
그런데 더 한심한 것은 그것이 선택의 고민을 하고 선택한 것도 아니라
생각 없이 선택하여 선택에 대한 죄의식도 없이 자연스럽다는 겁니다.
살이 찔까 안 찔까를 생각하며 음식을 먹을까 말까를 생각하고,
건강 때문에 이 음식을 먹을까 저 음식을 먹을까를 생각하긴 하여도
하느님을 생각하며 먹을까 말까, 뭘 먹을까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그냥 먹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는
주님의 말씀이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는
예레미야서의 말씀도 의도적으로 그러니까 주님을 반대하기 위해
세상 편에 서고 마음이 악하여 고집스레 반대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상 선택이요 무의식의 하느님 불 선택의 관점에서 봅니다.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는 오늘 예레미야서 말씀처럼 분명 의도적이고 고집스레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주님과 반대편에 서며 그래서
주님과 함께 모아들이지 않고 흩어버리는 그런 악마적인 존재도 있지요.
그러나 우리 같은 보통의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선택한다면서
실제로는 절대적으로 선택하지 않고 세상을 선택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그러니까 알면서 하느님을 반대하지는 않음에 안심하는 거지요.
그런데 의도적으로 불순종하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고 다른 길로 가는 것과
생각 없이 내 좋을 대로 가느라 주님을 따라 가지 않는 것이 뭐 다릅니까?
주님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면에서 같은 결과가 아닙니까?
그러니 하느님 반대편에 있지 않다고 안심하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느님 편에 반드시 서야지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 편에 있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하느님 존재를 부정하지 않지만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내 실제 삶에는
있어도 그만이요 없어도 그만인 실천적 무신론자의 경우도 있고,
내가 하느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 편에 있어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신앙인의 경우도 있지요.
아마 우리의 경우는 무 자르듯이 이거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천적 무신론과 자기중심적 신앙의 요소가 얼마간 섞여 있으면서
하느님을 따르는 신앙인들이 아닐까 그래서 반성을 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