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이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오늘 주님 말씀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에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율법교사의 질문,
어떤 계명이 계명 중에 첫째가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사랑하느냐의 문제 이전에 사랑이
다른 모든 계명과 실천보다 앞서는 것임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하느냐’보다 앞서
‘사랑을 무엇보다 앞서 실천하고 있느냐’의 관점에서 성찰합니다.
참 헷갈립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고 미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랑을 제일 중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걸 더 중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저는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사랑을 제일 중시하는 건 분명하지만 순간순간 다른 것에 방해받거나
시선을 빼앗겨 사랑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기거나 집착을 하곤 합니다.
그러면 저의 사랑을 방해하고 시선을 빼앗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어렸을 때부터 끈질기게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이상주의와 완벽주의입니다.
누구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끈질기게 이상적인 나와 너이기를,
그것도 완벽하게 그러기를 바람으로써 그렇지 못한 저와 다른 사람을
사랑치 못하고 미워했습니다.
다음은 정의의식이랄까 율법주의입니다.
저뿐 아니라 수도자들 대부분이 사랑보다 정의의식이 강하고
그래서 뭐든지 똑바르고 올발라야 하고 그래서 율법주의적입니다.
당연히 정의가 사랑보다 앞서고 법이 사랑보다 앞서며
정의와 법의 잣대에 어긋나는 자신과 남을 사랑치 못하고 미워합니다.
다음은 욕심인데 저나 수도자의 경우 돈이나 명예욕보다는
보통 사람 욕심, 곧 내 맘에 드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그 욕심 때문에
그렇지 못한 자신과 남을 사랑치 못하고 미워합니다.
어떤 때는 일이 사랑을 방해합니다.
남자들이 흔히 일에 빠져 사랑을 등한시 하는데 저도 그런 면이 있지만,
일에 있어서 다른 남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저의 일은 예를 들어
북한사업이나 지금 제가 하려고하는 협동조합과 같이 사랑사업인데
자주 일의 목표인 사람보다 일의 성취가 더 앞서곤 하는 점입니다.
귀차니즘이라는 말이 있지요.
아무 것도 하기 싫어하는 것인데 이 귀차니즘도 자주 사랑을 방해합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안정과 평안 상태에 있을 때에 그것을 깨기 싫어
누가 제 삶에 들어오는 것도 싫고 남의 일에 관여하기도 싫어합니다.
오지랖이 너무 넓고 관여가 병이었던 때도 있었는데
사랑 에너지가 떨어진 결과이고 현상인 것 같아 어떤 때는 슬픕니다.
그래도 어쨌거나 사랑은 해야 합니다.
안 하면 삶은 의미 없어지고 행복치 않은 것을 넘어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 에너지가 현저히 떨어졌는데도 뜨겁게 사랑하고자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사랑을 완전 충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 하느님을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이
이 경우 내가 사랑을 드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력을 다해 매달리는 겁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슬이 내려 나리꽃을 피우고 싹들을 돋아나게 하는 것처럼
당신 사랑만이 나를 살리시니 당신 사랑을 내려주십사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을 받지 못한 채 그래도 사랑을 하고자 한다면
큰 사랑 욕심 부리지 말고 작은 사랑이라도 하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