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예수님에 대해서 보는 것이 공관복음과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과 달리 마태오, 마르코, 루카의 복음을
보는 것이 같은 공관복음이라고 하고 요한복음은 따로 분류하지요.
그리고 공관복음 중에서도 마르코복음이 요한복음과 특히 많이 다른데
그것은 당신 신성을 감추시려고 애쓰시는 분으로 마르코복음이
예수님을 강조하며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신 다음 치유된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떠들고 다닐까봐 엄하게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이에 비해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얘기하고,
오늘복음에서는 주님 친히 이것을 증언하는 것들이 세례자 요한에서부터
당신의 일과 성경과 아버지까지 많다고 하십니다.
어떤 복음이 예수님의 실제와 가까울까요?
학자들은 대체로 마르코복음이 실제와 가깝다 하는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제일 먼저 쓰인 마르코복음은 예수의 신성을 감추는데
후대에 쓰인 요한복음은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려고 하고 오늘 복음은
한 술 더 떠 중이 제 머리 깎듯 예수님 친히 당신 신성을 증명하려
안달하시고 그걸 우리가 믿게 하려고 강요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아마 시기와 장소적 배경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 한참 지나 쓰였고
장소도 이스라엘과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쓰였기에 당대 그곳 사람들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듯 예수의 신성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분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 모습을 본 적도 없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이 좋고 그분이 훌륭한 분이라는 것은 모두 인정하지만
그분이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은 인정하기 어렵고,
설사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라고 인정을 한다고 해도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거지요.
그래서 오늘 당신이 하신 일이 당신 신성의 증거라고 주님 말씀하시지만
동시대인들은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보고도 신성을 믿지 못했고
지금의 유대인들에게도 예수는 신성모독죄를 지은 사람일뿐이며
이슬람도 예수를 예언자로까지는 인정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라고 하지요.
예수의 인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는 것은 믿음의 눈이 아니면
불가능하고 그래서 오늘 주님도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이 믿음의 눈을 우리가 가져야 하는데 오늘 저는 믿음의 눈은
믿으려는 사람의 눈에서 시작된다고 말씀드리는데 저의 경험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젊었을 때 그러셨겠지만 저도 신학교 다닐 때까지도
하느님은 믿겠는데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은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프란치스코가
예수님을 너무도 사랑하고 주님으로 고백하며 따랐습니다.
그의 가난과 겸손과 자유와 사랑과 형제애가 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따랐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프란치스코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겼으니
분명 예수님이 그리스도신데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체험을 한 반면에 저는 아직 체험을 못 한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프란치스코와 같이 믿음의 눈을 갖기 위해
믿으려는 사람의 눈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또 보고 생각하고 기도하기를 깨달음이 올 때까지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제게는 이 깨달음이 안티오키아로 가던 바오로 사도처럼
한 번에 기적처럼 온 것이 아니라 보슬비에 옷 젖듯이 온 것인데
제게 프란치스코가 믿으려는 사람의 눈을 갖게 한 것처럼
저나 여러분도 다른 이에게 믿으려는 사람의 눈을 갖게 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