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이요 붙잡힌 여인이요 그래서 죽을 뻔한
여인을 마주하시고 짧게 세 마디를 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그런데 단죄하지 않겠다는 주님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여자가 죄를 짓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죄를 지었지만 그 까짓것 괜찮다는 뜻입니까?
주님은 간음행위가 아니라 음욕을 품거나 생각만 하여도 간음한 거라고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보다도 더 엄하게 간음죄를 적용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단죄하지 않겠다는 것은 과거의 죄가 없다거나
이제부터 다시 죄짓지 말라고 하신 것을 보면
과거의 죄를 미래에 또 지어도 괜찮다고 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지요.
미래에 다시 죄짓지 않기 위해서 살아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죄를 짓지 않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어서 더 이상 죄를 지을 존재조차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서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다시는 죄짓지 않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중에 바리시아와 율법학자는 이런 인간은 죽여 버려서
죄건 뭐건 다시는 아무 것도 못하게 하는 쪽을 선택한 겁니다.
지금 우리의 사형제가 바로 이런 거지요.
흉악범과 상습범은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게 아예 존재를 없애자는 겁니다.
이에 비해 주님께서는 죄를 없애야지 존재를 없애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단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로 인해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 겁니다.
죽으면 죄도 끝나지만 새로운 삶도 시작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 “가거라.”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집으로 가라는 말씀이겠습니까?
과거로 돌아가라는 말씀이겠습니까?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 미래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라고 하시는 것이고 과거로부터 해방시키시는 말씀이겠지요?
오늘 독서들이 다 이 메시지인데 이사야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지 말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말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바오로 사도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쾌락에 젖어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욕망에 빠져 탐욕스럽게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세상명예와 허영에 취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늘과,
그 하늘에서 주실 상을 목표로 이 세상에 연연하지 않고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향해 앞으로 달려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연연만이 아닙니다.
과거의 죄와 죄의 과거에 의한 심리적이고 존재적인 얽매임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죄를 짓고도 뻔뻔한 사람도 있어 문제지만
죄책감이 너무 강해 죄와 과거에 매이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죄책감이 자기 죄에 대한 책임감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많은 경우는 내 집의 조그만 더러운 것도 참을 수 없는,
그런 결벽주의와 완벽주의 때문에 죄책감에 사로잡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내 존재가 자유롭기 위해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죄를 지어도 죄책감에 매이지 않기로 다시 결심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인간적인 저의 생각으로는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시려고..
근데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로부터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내면에 심겨진 양심을 믿으신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양심대로 산다면 자신의 부족함을 경험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없으며 단 한 번도 죄에 물듦이 없이 산다고 스스로 장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그러니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나! 이거지요.
한마디로 인간이 인간을 단죄할 수 없다는 경종의 말씀이 아닌가싶습니다.
그동안 제가 수없이 묵상한답시고 했던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짓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이 복음에 등장하는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으로만 여기고
저와는 무관한 제 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았던 제 자신을 보면서
늘 제가 그 인간이 그 인간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오늘은 잠깐 제 정신이 돌아왔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단죄하고 심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반복된 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회개와 용서의 기회를 주시지만,
그 기회가 마냥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 써버린 시간 앞에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누군가의 시어처럼 뒤늦은 후회가 되지 않도록 참회하는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내 존재가 자유롭기 위해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죄를 지어도 죄책감에 매이지 않기로 다시 결심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