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의 주제는 모든 민족들의 아버지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믿고 희망해온 예수 그리스도라고 함이 좋을 겁니다.
독서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었는지를 얘기하고,
복음의 주님은 아브라함이 당신의 날을 예견하고 즐거워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민족들의 아버지라고 함은 생물학적인 민족,
그러니까 이스라엘 족속이니 아랍족이니 조선 사람이니 하는
그런 혈통적이고 문화적인 뜻에서 민족들의 아버지가 아니고
하느님을 믿는 모든 족속들의 아버지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우리도 믿는 족속이라면 아브라함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 전례가 우리에게 말하는 내용입니다.
우선 우리는 오늘 아브라함처럼 얼굴을 땅에 대고
하느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저는 오늘 창세기를 읽으면서 첫 구절이 그려지며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자세는 자신을 한껏 낮추는 자세이며
분부를 받드는 자세로서 우리가 사제 서품식이나
수도자의 서약식에서도 볼 수 있는 장면이지요.
사실 오늘 창세기는 1절에서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어라.”라고 하시자
3절에서 아브라함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으로 얘기하고 있지요.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았어도 상관없고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은
그 순간부터 흠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흠 없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앞에서 사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분부하실 때는 이렇게 땅에 엎드려 분부 받잡는 삶입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이런 자세가 좋아 보이고
저도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을 보면 제가 전보다 겸손해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전엔 창세기의 이 구절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뭘 하든 늘 하느님 앞에서 하고 하느님께서 분부하실 때 얼굴을 땅에 대고
분부 받잡는 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기도 하고 기도이기도 하지요.
다시 말해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삶인 것입니다.
너무도 자주 제가 말씀드리듯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 뭐라 뭐라
말하고 이것저것 청하는 것이기 이전에 이렇게 하느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주님,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나이다.’라고 하는 것이어야 하지요.
아무튼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때 주님은 계약의 내용을 말씀하시기 전에 당신을 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이고 아직 자식이 없는데
후손이 많게 되고 여러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네 나이를 보지 말고 하느님 당신을 보라는 말씀이지요.
우리도 내 꼴을 보면 믿을 수 없고 믿음의 조상은 더더욱 될 수 없습니다.
나를 보면 나란 자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고 나를 믿었다가는 실망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고 믿은 바를 실망치 않고 끝까지 믿은 것은
하느님을 봤고 또 늘 하느님을 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오늘 독서에 이어지는 창세기를
계속 보면 아브라함이 이 말씀을 듣고 즉시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속으로 웃으며 이 나이에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하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보지 않고 자신을 볼 때 자주 불가능을 보지만
불가능이 자꾸 눈에 들어올 때 오히려 하느님을 보라는 메시지로
오늘 말씀들을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