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오늘 독서가 참으로 좋고 그래서 독서를 가지고 나눔을 하고 싶지만
복음도 좋아서 복음을 가지고 나눔을 하기로 하였고,
복음이 전체적으로 다 좋지만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는 말씀이 특히 좋아서 이 나눔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무엇을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쫓아내는 것이 있고, 몰아내거나 질질 끌어내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좋은 의미가 아니지요.
원치 않는데 안에서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그리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 경우가 많지만
사랑으로 그리 할지라도 그 사랑이 높은 차원의 사랑은 아니기 쉽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는데 이런 것들은 대개
자기는 안에 있으면서 자기가 싫어하는 누구를 밖으로 나가게 하거나
자기가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폭력적으로 밖으로 나가게 하는 거지요.
이런 것들에 비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사랑이고,
사랑도 아주 차원이 높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밖으로 불러내는 것은 안의 비구원에서 밖의 구원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고,
나오게 하되 도매금이 아니라 하나하나 불러서 인격적으로 나오게 하는데
우선 안의 비구원에서 밖의 구원으로 나오게 하는 사랑의 측면을 보렵니다.
밖으로 불러내기 전의 안은 비 구원 곧 갇혀있는 상태입니다.
자기에게 갇혀 있건 죄에 갇혀 있건 두려움에 갇혀 있건,
또는 가까스로 갖게 된 내적 평안과 만족에 안주하는 것이건
구원의 세계가 열려있는데도 스스로 그 밖의 세계로 나가지 못하는 겁니다.
밖으로 나오면 햇빛을 받을 수 있고,
밖으로 나오면 풀밭이 펼쳐져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우리를 참으로 좋은 목자이신 주님은 무작정 나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비구원의 내용을 헤아리며 나오라 하시고,
일괄명령이 아니라 하나하나를 달래고 안심시키며 불러내십니다.
그것이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목자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목자가 양들의 부르기 위해서는 이름을 다 지어주었겠지요.
그것은 다른 양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이고 구별하더라도 번호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사랑이 담긴 이름으로 구별하는 겁니다.
제가 군대에 가 훈련소에 있을 때 번호가 주어졌습니다.
제 이름이 김 찬선인데 그렇게 부르지 않고 123번 이런 식으로 불렀습니다.
똑같이 수없이 만들어내고는 거기에 일련번호를 붙인 제품처럼 제가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무척 나빴지요.
이렇게 저의 개성과 고유성은 무시당하고
인간이 아니라 군바리가 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몇 주 가니까 그것이 당연하고 괜찮은 듯
그런 문화를 제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집에서 키우는 반려견은 이름을 붙여주고 옷도 입혀주지만
개 사육장의 개들은 이름이 있을 리 없고 정말 안 좋은 환경에서
집단 사육되고, 그저 먹이만 주어질 뿐이지요.
사랑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돈 벌기 위해 키우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름을 붙여줄 만큼의 사랑도 없지만 팔아먹을 것에
이름을 붙이면 정 들어 팔 수 없기에 이름을 붙일 수 없겠지요.
주님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며 불러내실 때
나는 냉큼 나에게서 나와 은총에로 나아가겠습니다.
사랑으로 부르시니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홀로 영원히
찬미찬양 바드으소서!
영광이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