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몇 마디 안 되는 짧은 말씀이고 단순한 말씀이지만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생각게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는데도
어디로 가시는지 묻는 제자가 하나도 없음에 어찌 그럴 수 있냐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 제게는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너 레오나르도야, 너는 어찌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느냐?
궁금하지도 않느냐?’고 제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친구들끼리 모임을 하였습니다.
시간이 되어 집에 가기 위해 나오는데 친구들은 제가 가는 것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자기들 얘기에 열중합니다.
제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고, 오는지 가는지 신경 쓰지 않는 친구들에게
저는 무척 서운할 것이고 ‘다시는 니네들과 만나나보라.’고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식으로 서운해 하셨을까요?
서운해 하시기보다는 한심해 하시고 걱정스러워 하셨을 거고,
저도 지금 그렇다면 저에게도 마찬가지이실 겁니다.
오늘 주님의 한탄은 당신이 어디로 가시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저 주님이 떠나고 난 뒤의 자기들 처지를 생각하며 뒤숭숭해하는
제자들에 관한 것이며 그래서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관심이 없는 중생의 모습입니다.
<어디로>를 생각지 않는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요?
잘 사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저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종종 얘기하고,
그것이 잘 사는 것인 양 여겨지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떻게 평가를 받을까 전전긍긍하거나
성공과 실패, 곧 일의 결과를 생각하며 너무 근심걱정 하거나
그러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이 현실을 잘사는 것인지 몰라도
인생을 잘 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배를 젓는 것이라면 열심히 배를 젓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거나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에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젓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은 가는 것이고 그래서 나그네 길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말은 이런 철학을 잘 담고 있어서 사는 것을 그저 산다 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하고, 죽는 것도 그저 죽는 것이 아니라 죽어간다고 하지요.
주님께서는 이 세상 우리에게 오실 때부터
아버지께로부터 왔으니 아버지께 돌아가야 한다는 의식이 분명하셨고,
우리도 아버지께 데리고 가야 한다는 사명의식이 분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떠나가신다고 하지 않고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셨고,
당신만이 아니라 우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신다고도 하셨는데
제자들과 우리는 있어야 할 곳을 생각지 않고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자식이 있는 이곳입니까, 하느님이 계신 저곳입니까?
지금 이런 질문이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이런 질문을 생각지 않다가
죽게 되면 우리의 죽음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끝장이 나는 돌연사인데 이것을 생각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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