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도
머리를 기댈 곳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좋기만한 일은 아닙니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할 거처가 없습니다.
한 곳에 머무르면서 적응할만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하는 그런 삶입니다.
그러다보니 내 것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짐이 되고,
오히려 나를 더 힘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가난의 모습을 택하게 됩니다.
가난에서 오는 불편함,
한 곳에 계속 머무르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불안정,
그리고 그 불안정에서 오는 불안함,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고통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사람은 한 곳에 머무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곳에 머무르는 순간
사람은 무엇인가 하나씩 하나씩
내 것을 만들어 갑니다.
살아가는 데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니까,
이것도 소유하고 저것도 소유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유는 물질적인 것을
점점 넘어갑니다.
나와 친한 사람,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간 관계를 소유하고 싶은 사람은,
다른 것에 비해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사람은,
그래서 그 관계를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면
관계가 깨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왠만한 것은 그대로 덮고 가고,
눈 감아 버립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하느님의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드러내시려고 하는데,
인간 관계가 중요하다보니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드러낼 수도,
상대방의 못브을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하느님의 모습도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 안에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계시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것,
불편합니다.
불안정해서 불안합니다.
하지만 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도 괜찮기에,
오히려 편안합니다.
감추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불편함과 불안함은 있습니다.
이 말은 뒤집어서 보면,
어느 쪽을 선택해도 편안함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면서 얻게 되는 편안함을 선택할지,
무엇인가 손에 쥐면서 얻게 되는 편안함을 선택할지,
그 몫은 각자에게 있습니다.
완전 공감글 감사합니다.
명쾌하고 상쾌합니다.
인간관계의 과다한 소유로 제가
저지르고 있는 중대한 실수가 점
점 무거워지고 있던중..
깨우쳐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