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오늘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외딴 곳으로 물러가시는데 제 생각에 그것은 완전히 홀로 가신 겁니다.
다른 곳에서는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곳으로 가신 얘기가 있지만
오늘 세례자 요한의 소식을 듣고서는 제자들도 놔두고 홀로 가신 겁니다.
왜 외딴 곳으로 가신 것이고 무엇 하러 가신 걸까요?
오늘 주님의 이 행위에서 우리는 원인적인 ‘왜’와
목적적인 ‘왜’를 볼 수 있는데 먼저 주님께서 외딴 곳으로 가신 원인적인
‘왜’를 보면 그것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가져다 준 충격 때문일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선구자기에 그의 죽음이 주님께는 남의 일이 아니라
당신이 죽어야 할 죽음을 앞서 보여주는 충격적인 것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그래서 그 충격이 다른 모든 것 그러니까
사람도 일도 모두 물리치고 홀로 물러가게 하였을 겁니다.
이것이 원인적인 ‘왜’라면 목적적인 ‘왜’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혼자이시만 혼자가 아닙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제자들까지 옆에 없는 완벽한 혼자시지만
아버지 하느님과는 함께 계시니 혼자가 아니고
그래서 그것은 혼자 있음이 아니고 같이 있음이며 곧 기도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충격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보통의 사람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충격 때문에 홀로 있던지 반대로 오히려 사람들한테 가던지.
그러나 이것은 다 인간적인 행위일 뿐 기도가 아니지요.
충격을 혼자 끙끙 알며 해결하던지 사람들에게 얘기하여 해결하려는 것이고,
하느님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이렇게 주님과만 함께 있고픈 주님을 사람들은 놔두지 않고 그래서
당신께 몰려든 사람들로 아버지와 마주하려던 주님은 사람들과 마주합니다.
거창하게 얘기하면 이것이 주님의 운명입니다.
혼자 있을 수도 없고 하느님과만 있을 수 없는 운명 말입니다.
사실 모세도 그렇고 주님은 더더욱 늘 사람들에게 시달릴 운명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모세처럼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시달릴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들을 물리칠 수 없지요.
이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의 운명이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운명입니다.
자기의 문제로 하느님과 대면하고 싶은데
이제 다른 사람들의 문제로 하느님과 대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불평을 듣고 그 불평을 하느님께 전하고,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가엾음을 보고 하느님께 아뢰어 해결하십니다.
하느님과 대면하는 기도가 사람들과의 나눔으로 바뀌는 것인데
이 기도와 나눔의 공통점은 사랑입니다.
하느님과 사랑을 나누는 기도와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나눔인 거지요.
기도도 사랑이고 나눔도 사랑인 삶을 살아야 할 운명을
나도 받아들일 것인지 도전을 받는 오늘입니다.
(불평보다 불평의 기도가 좋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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