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연중 32 주일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고,
이 세상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얘기합니다.
우리 인간은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지 관심이 많으면서
동시에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고난 뒤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반대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두려운 사후 세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것 안에서만 잘 안다거나 다 안다고 하며 짓까불며
모르는 것은 알려고도 않고 모르는 세계로는 나아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만도 힘든데 알지도 못하고 두려운 저 세상에 대해
뭣하러 관심을 가지느냐며 아예 무관심해버리는 사람과
그래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죽으면 그만이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래도 용기를 내어 관심을 가지는 사람입니까?
사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려고 하는 것은 깜깜한 동굴,
그래서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곳을
탐험하는 것과 같이 두려운 것이고 그래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이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실제로 죽으면 그만입니다.
이 세상에 있던 것들은 죽음으로 끝나고 저 세상에는 없으며,
이 세상의 빛들이 꺼쩌버린 저 세상에는 빛이 없고 캄캄하며,
이 세상에서 맺어진 결혼 인연은 이 세상에서 끝나고 저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캄캄하고, 모르고,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세계가 바로
우리의 세계가 아니라 신의 세계인 것이고 신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캄캄하고, 모르고, 없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가 바로 신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신은 신이 아니고 그래서
모르는 것이 신이고,
없는 것이 신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모르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무지이고, 불신이고, 무신론이고, 교만이고,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실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요, 믿음이요, 겸손인 것입니다.
사실 신은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두려움 가운데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모르는 두려움 가운데서 신이 드러나고
경험으로 알게 되는 것이며 이 하느님 체험이 없을 때 죽으면 그만이고,
죽음 이후의 세계는 모르는 것이요, 두려운 것이요,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다행이도 우리가 모르는 신을 아는 분들, 곧 경험한 분들이 있지요.
하느님과 함께 있다가 오신, 하느님을 가장 잘 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경험한 사도들과 성인들입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이분들에게는 죽음의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것을 확신하고 하느님 계신 것이 확실하기에
두려울 것이 없을뿐더러 아예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라는 시편 말씀처럼
이분들 덕분에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에서도 우리는 빛을 보고
오늘 1독서의 아들들처럼 죽음 앞에서 두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종말론적인 지혜)
http://www.ofmkorea.org/113534
16년 연중 제32주일
(부활, 관계의 재편)
http://www.ofmkorea.org/95082
15년 연중 제32주일
(사랑하는 사람의 겸손한 당당함)
http://www.ofmkorea.org/84113
13년 연중 제32주일
(하느님께는 죽음도, 죽은 사랑도 없다)
http://www.ofmkorea.org/57627
12년 연중 제32주일
(아무 것도 자신을 위해 남기지 마라!)
http://www.ofmkorea.org/43724
11년 연중 제32주일
(주님을 찾으러 갈 필요가 없다.)
http://www.ofmkorea.org/5359
10년 연중 제32주일
(죽은 다음)
http://www.ofmkorea.org/4555
09년 연중 제32주일
(겸손한 부끄러움과 교만한 부끄러움)
http://www.ofmkorea.org/3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