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성 안에서 태어나는 성탄의 신비
용서 없는 삶은 하느님의 신비에 접근하기 어렵다.
신비에 접근하지 못하는 삶은 하느님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자기에게 갇혀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갇히면 인과응보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고
업적과 공로를 통해 보상을 기대하며
통제와 지배로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을 염두에 두고 연기하는 배우처럼 산다.
하느님의 신비에 접근하는 최상의 방법은 용서하는 일이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용서하는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배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의 결과가 아니라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결과로 용서하기 때문이다.
용서는 복음의 핵심주제 중의 하나이지만
늘 변두리로 밀려나 있거나 다음으로 미뤄져 있는 현실이다.
미뤄놓은 것은 해결되지 않은 채 삶의 끝까지 간다.
그러므로 용서 없는 진실은 복음을 발생시킬 수 없다.
용서의 핵심에는 선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업적과 공로의 결과가 아니고 거저 받은 은총이며
친구요 연인이자 아버지이신 분의 겸손한 자비가
관계를 재설정하게 해주는 창조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최후의 순간에도 용서하면서 살리셨다.
기쁜 소식은 이익을 우선시하는 계산서를 만들지 않는 데서 나온다.
그래서 복음의 핵심에는 죽음이 있다.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인 체면과 자존심의 죽음이다.
용서받고 용서하지, 용서하고 용서받는 구조가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용서가 없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상처를 주고 폭력을 저질러왔다.
미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앙갚음의 칼을 내려놓게 하는 완전한 선물의 세상,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새 창조의 복음,
진리를 품은 현재가 용서하는 현재가 되는
관계성에서 태어나는 성탄의 신비,
육화의 신비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