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조각하는 조각가
조각가의 손에든 도구는 조각가의 생각과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
선을 조각하는 사람은 미움을 제거함으로써 선을 드러낸다.
미움을 없애고 거짓으로 포장된 가짜를 드러내면
참된 선만이 남게 되어 분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미움이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 현장에서 감추어진 선을 드러내려면
깨우침과 방향을 잡아 주는 예수그리스도와 만나야 한다.
그분은 죽음을 통해 미움과 거짓을 폭로하셨다.
미움은 그 동기를 교묘하게 사랑으로 포장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하느님을 위한 명분으로 그렇게 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관계를 파괴한다.
진실을 말하거나 선을 실천하는 자들은 언제나 미워하는 자들의 표적이 된다.
자신들의 거짓이 드러날까 두려워 없애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선은 그 자체로 어둠을 밝힌다.
미움을 이기는 방법은 더 큰 미움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선을 하나 행하는 것이다.
선은 탓을 하지 않고 미움을 없앤다.
선은 말없이 사랑하는 법으로 미움을 없앤다.
선은 과정의 충실로 미움을 없앤다.
선은 자기 죽음을 통해 미움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은 열매라기보다 과정의 진실 안에 숨겨져 있다.
과정의 진실을 빼놓은 선은 선이 아니다.
구체적이고 섬세한 동기가 그리스도와 연결에서 나오기 때문에 두려움을 몰아낸다.
미움이 있는 사람은 늘 두려워한다.
두려움은 미움 뒤에 숨어서 변장하는 선이다.
두려움은 미움을 감추기 위해
앙갚음하려는 복수심과 공허를 감추고, 이기적인 탐욕을 감추면서
합리화하고, 도덕적이고 상식을 강조하고 여러 가지 영성으로까지 교묘하게 변장한다.
우리는 그것을 위선이라고 부른다.
진리를 품은 현재로 행하는 선 앞에서 위선은 적나라한 거짓으로 드러난다.
선을 조각하는 조각가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분은 죽음으로 아버지의 자비와 선하심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는 곳에는 언제나 작은 죽음들이 있다.
아버지의 자비가 나의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현장에는
죽음을 이기신 부활하신 분께서 두 팔을 벌리고 환하게 웃으시며 나를 맞이하신다.
기쁨과 자유와 벅찬 감동들이 작은 죽음 뒤에 있다.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곳
지금 여기서 누리는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우리의 일상의 관계에서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