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이가 눈 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느냐 하시는데,
어찌 보면 인도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 영적 동반을 받으러 사람들이 가끔 찾아오는데
저와의 대화를 통해서 길을 찾고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저도 흐뭇했던 적이 많습니다.
눈 먼 제가 사람을 인도할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저야말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신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를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는 보는 바로 그것 때문에
눈이 먼 저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인도하기도 하는가봅니다.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의 문제는 객관적으로 보기에 해결책이 보입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와 멱을 감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저는 헤엄을 조금 치고
그 친구는 헤엄을 전혀 치지 못하기에 그냥 물놀이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허우적대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흐려 쑥 꺼진 곳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1m만 나와도 얕은 곳인데 당황을 하니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허우적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서 등을 조금 떼밀어주니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무릇 모든 봄은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눈이 얼굴에 있고
얼굴이 눈에서 제일 가깝지만
얼굴에 붙은 밥풀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타자의 바라봄-객관이 필요하고
거울이라는 객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떨어져 있음-거리가 객관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거리와 객관을 확보하지 못할 때
자기를 보지 못함,
특히 자기의 잘못을 보지 못함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또 그러니 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자명합니다.
자기를 잘 보기 위해서는,
1) 자기의 눈만으로는 자기를 보지 못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2) 자기의 모습을 일러주는 다른 이의 눈이 필요합니다.
3) 다른 이의 눈이 없으면 거울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무엇이 거울입니까?
모든 이의 덕행과 악행이 모두 거울입니다.
상대의 얼굴에 숯검댕이가 묻었으면 나도 묻었음을 보는 것입니다.
이웃의 덕행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글라라 성녀는 우리 서로 거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영광의 광채요
영원한 빛의 반사이며 티 없는 거울이시니,
오 왕후이신 자매여, 이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시고
모든 덕행의 꽃과 의복으로 속속들이 단장하고
여러 가지 보석으로 그대 안팎으로 꾸미도록
그대 얼굴을 그 거울에 자주 비춰 보십시오.”
같이 사는 형제, 자매가 우리의 거울입니다.
성인, 성녀들이 우리의 거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매일 봐야 할 거울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우리가 매일 봐야 할 거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이 분이 하느님 아버지를 비추실 뿐 아니라
우리도 비추시는 가장 티 없는 우리의 거울이십니다.
어찌 보면 인도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 영적 동반을 받으러 사람들이 가끔 찾아오는데
저와의 대화를 통해서 길을 찾고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저도 흐뭇했던 적이 많습니다.
눈 먼 제가 사람을 인도할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저야말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신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를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는 보는 바로 그것 때문에
눈이 먼 저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인도하기도 하는가봅니다.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의 문제는 객관적으로 보기에 해결책이 보입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와 멱을 감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저는 헤엄을 조금 치고
그 친구는 헤엄을 전혀 치지 못하기에 그냥 물놀이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허우적대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흐려 쑥 꺼진 곳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1m만 나와도 얕은 곳인데 당황을 하니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허우적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서 등을 조금 떼밀어주니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무릇 모든 봄은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눈이 얼굴에 있고
얼굴이 눈에서 제일 가깝지만
얼굴에 붙은 밥풀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타자의 바라봄-객관이 필요하고
거울이라는 객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떨어져 있음-거리가 객관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거리와 객관을 확보하지 못할 때
자기를 보지 못함,
특히 자기의 잘못을 보지 못함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또 그러니 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자명합니다.
자기를 잘 보기 위해서는,
1) 자기의 눈만으로는 자기를 보지 못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2) 자기의 모습을 일러주는 다른 이의 눈이 필요합니다.
3) 다른 이의 눈이 없으면 거울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무엇이 거울입니까?
모든 이의 덕행과 악행이 모두 거울입니다.
상대의 얼굴에 숯검댕이가 묻었으면 나도 묻었음을 보는 것입니다.
이웃의 덕행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글라라 성녀는 우리 서로 거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영광의 광채요
영원한 빛의 반사이며 티 없는 거울이시니,
오 왕후이신 자매여, 이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시고
모든 덕행의 꽃과 의복으로 속속들이 단장하고
여러 가지 보석으로 그대 안팎으로 꾸미도록
그대 얼굴을 그 거울에 자주 비춰 보십시오.”
같이 사는 형제, 자매가 우리의 거울입니다.
성인, 성녀들이 우리의 거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매일 봐야 할 거울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우리가 매일 봐야 할 거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이 분이 하느님 아버지를 비추실 뿐 아니라
우리도 비추시는 가장 티 없는 우리의 거울이십니다.
순간 순간 들여다 봅니다.
그러면 모든 욕심,고통, 미움이 사라 질 거예요.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만 다른 이를 인도할 수 있다는 말이 있지요.
그 만큼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며
자신이 경험한 만큼만 다른 이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경험에는 인간인 자신이 얼마나 좌절하기 쉬운 나약한 존재이며,
뿌리 깊은 이기심과 교만한 속물근성을 지닌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꼈던 순간들을 통해 자신의 눈에 들보를 빼내는 아픈 경험이
다른 이의 눈에서 티를 상처 없이 빼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영광의 광채요
영원한 빛의 반사이며 티 없는 거울이시니,“
그 거울을 보며
우선 먼저 제 눈에 들보를 빼내는 아픈 경험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