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랑하는 복음 중의 하나.
그래서 한 자, 한 자 새기는 마음으로 적어봅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어제 아침, 돈암동에서 있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가고 있는데
70대 초반의 노인이 마주 오고 있었습니다.
어제는 비가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산도 없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등도 굽어 머리가 아니라 등으로 모든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굽은 등이 여간 가엾지가 않았습니다.
노숙자임에 틀림이 없는데
가을밤의 추위를 밤새 몸으로 견뎠을 양반이 비까지 맞으니....
감기보다 더한 감기가 걸릴 것 같았습니다.
그제 밤 11시가 넘어 외국 여행을 마치고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데
술이 잔뜩 취한 40대가 아예 전철 의자에 누워버렸습니다.
인생의 고단함이 잔뜩 배어있는 얼굴과 몸뚱아리.
마지막 차라고 하는데 이렇게 잠자다 내릴 곳에서 못 내리고
종착역에 가서 쫓겨나면 얼마나 난감할 까.
깨어 어디까지 가는지 확인하고 어떤 조치를 취할까 생각다가
긴 여행의 피곤함 때문에 어찌 되겠지 하고 그냥 내렸습니다.
그제의 께름칙한 마음이 남아 있었는지
비를 맞고 있는 노인네를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지나쳐 가다가 다시 돌아가 쓰고 가던 우산을 드렸더니
팔이 아파 우산을 들 수도 없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지 하고 돌아서는데
아침을 못 먹어서 그런데 5천 원만 달라 합니다.
“5천 원만”이라는 말이 싫지가 않고 고마웠습니다.
저의 안쓰러워 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주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5천 원을 도와드릴 수 있음도 다행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등짝으로 비를 맞는 노인네가 왜 그렇게 안쓰러웠을까?
그 노인네가 저의 어머니고
그 노인네가 바로 저,
머지않은 날의 저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제 방에는 화분이 하나 있습니다.
오래 전 한 여름, 뒤뜰에 나가보니
저의 어머니가 잘 키우시던 꽃 화분이 배대기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결혼식 선물로 보내졌던 것 같은데 버려진 것입니다.
어머니 생각이 나면서 이럴 수는 없다 싶어 방으로 가져왔습니다.
내 비록 어머니께 쌀쌀 맞고 잘 찾아뵙지 못하지만
이 꽃을 어머니로 생각하고 잘 보살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어머니께는 불효이지만
저는 어머니 때문에 그 꽃을 사랑합니다.
同一視.
사랑의 同一視.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실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꽃을 어머니로 동일시합니다.
그제 전차의 40대를 저로 동일시합니다.
어제 70대 노인네를 예수님으로 동일시합니다.
바로 이 사람이
너의 형제이고
너의 어머니이고
심지어 너의 하느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한 자, 한 자 새기는 마음으로 적어봅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어제 아침, 돈암동에서 있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가고 있는데
70대 초반의 노인이 마주 오고 있었습니다.
어제는 비가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산도 없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등도 굽어 머리가 아니라 등으로 모든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굽은 등이 여간 가엾지가 않았습니다.
노숙자임에 틀림이 없는데
가을밤의 추위를 밤새 몸으로 견뎠을 양반이 비까지 맞으니....
감기보다 더한 감기가 걸릴 것 같았습니다.
그제 밤 11시가 넘어 외국 여행을 마치고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데
술이 잔뜩 취한 40대가 아예 전철 의자에 누워버렸습니다.
인생의 고단함이 잔뜩 배어있는 얼굴과 몸뚱아리.
마지막 차라고 하는데 이렇게 잠자다 내릴 곳에서 못 내리고
종착역에 가서 쫓겨나면 얼마나 난감할 까.
깨어 어디까지 가는지 확인하고 어떤 조치를 취할까 생각다가
긴 여행의 피곤함 때문에 어찌 되겠지 하고 그냥 내렸습니다.
그제의 께름칙한 마음이 남아 있었는지
비를 맞고 있는 노인네를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지나쳐 가다가 다시 돌아가 쓰고 가던 우산을 드렸더니
팔이 아파 우산을 들 수도 없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지 하고 돌아서는데
아침을 못 먹어서 그런데 5천 원만 달라 합니다.
“5천 원만”이라는 말이 싫지가 않고 고마웠습니다.
저의 안쓰러워 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주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5천 원을 도와드릴 수 있음도 다행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등짝으로 비를 맞는 노인네가 왜 그렇게 안쓰러웠을까?
그 노인네가 저의 어머니고
그 노인네가 바로 저,
머지않은 날의 저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제 방에는 화분이 하나 있습니다.
오래 전 한 여름, 뒤뜰에 나가보니
저의 어머니가 잘 키우시던 꽃 화분이 배대기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결혼식 선물로 보내졌던 것 같은데 버려진 것입니다.
어머니 생각이 나면서 이럴 수는 없다 싶어 방으로 가져왔습니다.
내 비록 어머니께 쌀쌀 맞고 잘 찾아뵙지 못하지만
이 꽃을 어머니로 생각하고 잘 보살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어머니께는 불효이지만
저는 어머니 때문에 그 꽃을 사랑합니다.
同一視.
사랑의 同一視.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실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꽃을 어머니로 동일시합니다.
그제 전차의 40대를 저로 동일시합니다.
어제 70대 노인네를 예수님으로 동일시합니다.
바로 이 사람이
너의 형제이고
너의 어머니이고
심지어 너의 하느님이라고 하십니다.
나눔 고맙습니다.
물리적으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정신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하는 사람들과 맞부딪칠 때 마다,
이웃사랑을 책임져야 히는 저의 행동반경이 어디까지일까!
갈등하게 되고 그 때마다 떠오르는 복음의 바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제 뒷통수를 칩니다.
물리적으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그냥 치나 치면 내내 마음이 찜찜하면서도,
이러 저러한 이유로 나 몰라라 할 때가 많고,
상대의 정신적 성숙을 위해 어디까지 견디어 주고받아
주어야 하는가! 제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마다 고독해 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사랑하셨는데........
고맙습니다.
오늘 하루,
작은 것에 충실할 수 있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말씀 감사 합니다.
신부님 강론을 읽으며 마음이 점점 환해집니다.
사랑하는 일도.. 날마다 하느님 뵙는 일도..
모두 다 참 쉬운 일이네요..^^
同一視...
지금부터라도 同一視..그 사랑만 제대로 배울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