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바르티매오라는 앞 못 보는 거지와 예수님입니다.
바르티매오는 우리가 길가에서 자주 만나는 그런 거지이고
전철에서 우리의 작은 자선을 바라는 그런 앞 못 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별로 자신을 눈여겨보지 않아
눈길은 받지 못하고 발길에 자주 채이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로서 자기의 존재를 알려야만 합니다.
그것도 작은 소리로 알리면 아무도 보지 않기에
큰 소리로 알려야 합니다.
저를 한번 봐 주십시오.
유명인사와 선남선녀만 보지 마시고
이익이 되는 사람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보지 마시고
저도 봐 주십시오 하고 외쳐야 합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안 듣는 건지, 못 듣는 건지 모르지만 듣지 못하고
듣지 못하니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진짜 보지 못하는 사람은 구걸하는 맹인이 아니라
맹인을 보지 못하는 멀쩡히 눈 뜬 맹인들입니다.
눈뜬 맹인 중에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기에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사람도 있고
못 본 척 할 필요도 없이 무시하고 안중에도 없는 사람도 있고
재수 없게 왜 눈에 띄고 알장거리냐고 불쾌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바르티오매오와 맹인들은
보지 못하는 괴로움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인간으로 봐주지 않는
그 소외와 그 비인간화가 더 큰 괴로움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르티매오는
나자렛 예수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는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러 세웁니다.
지나가면서 사람들이 예수께 대해 하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청하는 마음을 더 간절하게 하기 위함인지
주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시고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꾸짖습니다.
그러자 바르티매오는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바르티매오처럼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를 알고
겸손하게 그러나 용기 있게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바르티매오의 이 간청의 기도는
미사의 시작 때 자비를 구하는 기도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이 기도를 마음을 다하여 바치지 않고
미사 형식으로, 그래서 건성으로 바쳤습니다.
아니 이 기도가 싫었습니다.
특히 옛날 기도문은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였기에
더 더욱 기도하기가 싫었습니다.
'내가 왜 불쌍해?'하고 거부감이 있었고
자비를 구해야하는 인간처지에 대해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사의 기도문 중에 정말 마음으로 기도하는 한 부분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우리 인간은 정말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이제는 바르티매오 못지않은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구합니다.
아직도 다른 인간에게는 자비를 구하지 못해도
하느님께만은 자비를 구합니다.
이렇게 간절히 구하자 그 간절함이 예수님께 도달하였나 봅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 하십니다.
오늘의 복음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 중에서 그 한 사람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한 사람을 향하여 바라보시고, 그 한 사람에게 응답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군중으로 한 인간을 소외시키고,
그래서 군중 속에서 고독합니다.
그래서 간혹 하느님은 저 많은 사람 때문에 나의 기도는 못 들으신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많은 사람 때문에
결코 소홀히 하지도 않으시고, 소외시키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너한테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너보다 유력한 사람이 도움 청하니
너를 도울 겨를이 없다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더 겸손하게
그러나 더 간절하고 큰 소리로 청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주님, 저와 저의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바르티매오라는 앞 못 보는 거지와 예수님입니다.
바르티매오는 우리가 길가에서 자주 만나는 그런 거지이고
전철에서 우리의 작은 자선을 바라는 그런 앞 못 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별로 자신을 눈여겨보지 않아
눈길은 받지 못하고 발길에 자주 채이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로서 자기의 존재를 알려야만 합니다.
그것도 작은 소리로 알리면 아무도 보지 않기에
큰 소리로 알려야 합니다.
저를 한번 봐 주십시오.
유명인사와 선남선녀만 보지 마시고
이익이 되는 사람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보지 마시고
저도 봐 주십시오 하고 외쳐야 합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안 듣는 건지, 못 듣는 건지 모르지만 듣지 못하고
듣지 못하니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진짜 보지 못하는 사람은 구걸하는 맹인이 아니라
맹인을 보지 못하는 멀쩡히 눈 뜬 맹인들입니다.
눈뜬 맹인 중에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기에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사람도 있고
못 본 척 할 필요도 없이 무시하고 안중에도 없는 사람도 있고
재수 없게 왜 눈에 띄고 알장거리냐고 불쾌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바르티오매오와 맹인들은
보지 못하는 괴로움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인간으로 봐주지 않는
그 소외와 그 비인간화가 더 큰 괴로움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르티매오는
나자렛 예수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는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러 세웁니다.
지나가면서 사람들이 예수께 대해 하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청하는 마음을 더 간절하게 하기 위함인지
주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시고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꾸짖습니다.
그러자 바르티매오는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바르티매오처럼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를 알고
겸손하게 그러나 용기 있게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바르티매오의 이 간청의 기도는
미사의 시작 때 자비를 구하는 기도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이 기도를 마음을 다하여 바치지 않고
미사 형식으로, 그래서 건성으로 바쳤습니다.
아니 이 기도가 싫었습니다.
특히 옛날 기도문은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였기에
더 더욱 기도하기가 싫었습니다.
'내가 왜 불쌍해?'하고 거부감이 있었고
자비를 구해야하는 인간처지에 대해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사의 기도문 중에 정말 마음으로 기도하는 한 부분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우리 인간은 정말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이제는 바르티매오 못지않은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구합니다.
아직도 다른 인간에게는 자비를 구하지 못해도
하느님께만은 자비를 구합니다.
이렇게 간절히 구하자 그 간절함이 예수님께 도달하였나 봅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 하십니다.
오늘의 복음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 중에서 그 한 사람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한 사람을 향하여 바라보시고, 그 한 사람에게 응답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군중으로 한 인간을 소외시키고,
그래서 군중 속에서 고독합니다.
그래서 간혹 하느님은 저 많은 사람 때문에 나의 기도는 못 들으신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많은 사람 때문에
결코 소홀히 하지도 않으시고, 소외시키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너한테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너보다 유력한 사람이 도움 청하니
너를 도울 겨를이 없다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더 겸손하게
그러나 더 간절하고 큰 소리로 청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주님, 저와 저의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