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제가 좀 겸손해진 모양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조금은 겸손해진 모양입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글을 훔쳐보며
하느님께 반역의 기회를 엿보던 20대 때는
이 복음이 적지 아니 거슬렸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종이고 하느님은 주인이라는 것이 불만이어서
늦게까지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저였는데
이젠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고
마당쇠의 ‘당쇠’를 저의 인터넷 이름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분부를 받은 대로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복음은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라고 하는데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지 못한 것이 죄송스럽습니다.
예전에는 이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가 비참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비굴함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이젠 그것이 비참함도 비굴함도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저의 겸손이고 사랑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Kenosis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한 본질이 비움이고
사랑의 다른 한 본질이 낮춤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는
하느님의 Kenosis를 알지도 보지도 못했지만
이제는 그 끝자락을 조금이라도 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제가 좀 겸손해진 모양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조금은 겸손해진 모양입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글을 훔쳐보며
하느님께 반역의 기회를 엿보던 20대 때는
이 복음이 적지 아니 거슬렸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종이고 하느님은 주인이라는 것이 불만이어서
늦게까지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저였는데
이젠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고
마당쇠의 ‘당쇠’를 저의 인터넷 이름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분부를 받은 대로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복음은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라고 하는데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지 못한 것이 죄송스럽습니다.
예전에는 이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가 비참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비굴함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이젠 그것이 비참함도 비굴함도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저의 겸손이고 사랑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Kenosis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한 본질이 비움이고
사랑의 다른 한 본질이 낮춤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는
하느님의 Kenosis를 알지도 보지도 못했지만
이제는 그 끝자락을 조금이라도 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그것도 모잘라 십자가에 처형 되시고....
부잣집 따님으로 태어 나시어
주인이신 하느님을 사랑 하게 되어
집을 박차고 나오셔서 한평생을
가장 보잘 것없는 이들과 함께 동고동락을
하시며 살아오신 수녀님을 오늘 만나뵙고는
더 이상 나의 주인님에게 따질 일도 없고
지금 나의 사명을 묵묵히 실천 할 뿐 입니다.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나의 주인님,
당신때문에 행복을 알았습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누구에게 지배받기 싫어하고 오히려 다른 이의 위에 있기를 좋아하는
기질적인 부분이 저에게 강해서 인지 복음에 나오는 “종”이라는 단어는
늘 저에게 불편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턴가 과거사에서 받았던 노예적인 느낌을
강하게 받은 까닭이라는 이해력으로 정서적으로 영향 받지 않는
제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간식으로 들어온 먹을거리가 남으면 가끔 씩 퇴근 하고 가던 길에
아파트 경비실에 경비 아저씨가 자리에 계시거나 안계시거나 상관없이
드시겠지, 하고 놓고 가는 제 자신을 보면서,
선행을 할 때는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며 나팔을 불고
그리도 생색을 내던 그 시절이 있었지!
그래, 그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는 거지,
라며 스스로에게 미소를 머금었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또한
살면서 사랑을 해보니 사랑 받는 것도 행복하지만
누군가를 사랑 할 때가 더 행복하다는 걸 깨닫게 되더군요.
상대가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해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스스로 우러나서 사랑하게 되는,
다시 말하면, 저 좋아서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가 싶습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그 몰입의 순간이 제일 행복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그러니, 사랑으로 사랑을 알게 하시고
사랑하도록 인도하신 주님에게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 끝자락을 조금이라도 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봅니다,“
감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