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소파에 누워 오늘 복음을 묵상하고 있었는데
방에 걸려 있는 하 멜키올 형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같이 살 때 생각이 났습니다.
오늘 복음의 여러 말씀 중에서 씨가 뿌려졌지만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마음에 꽂히면서
그의 생전에 카나리아를 키우던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멜키올 형제는 모든 동물을 잘 키우셨지만
특히 카나리아를 잘 키우셨습니다.
저는 카나리아를 키워 한 번도 새끼를 까지 못했는데
멜키올 형제는 1년 4-5차례 새끼를 까게 했습니다.
호저에 있는 우양의 집에 같이 살 때
이 양반이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담배를 입에 무는 것이고 다음 하는 것이 카나리아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카나리아를 키울 때 본 대로 먹이도 주고 관심도 기울였는데
제가 키운 카나리아들은 한 번도 새끼를 까지 않았습니다.
제가 키운 카나리아들도 알을 깠지만 새끼는 까지 못한 것입니다.
카나리아 암컷이 아무리 품고 있어도 새끼는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품고 있는 알이 무정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컷이 새장에 같이 있었는데도 왜 무정란이 되었는지
저는 지금도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밭에 떨어집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신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굴 찾아가느냐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명인데
누구 마음 밭에서는 주님의 말씀이 생명으로 자라고
또 누구 마음 밭에서는 말씀이 무정란처럼 생명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오래 전 저는 전남 장성의 한 시골에 가서 시골살이를 하였습니다.
낮에는 그곳 사람들과 똑같이 들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교리도 하고 미사도 드리는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그 생활을 마칠 무렵 소위 피정이라는 것을 하였습니다.
마땅히 피정을 할 만한 곳이 없어
초등학교 분교를 빌려 마룻바닥에 하루 종일 앉아
프로그램이랄 것도 없는 아주 엉성한 피정을 하였는데
제가 하는 얘기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스펀지처럼 쏙쏙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같은 내용의 강의를 서울에서 할 때는
더 좋은 장소에서
더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했는데도
신자들이 수채 구멍으로 그냥 흘려보낸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들에게는 저의 말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있음을,
말하자면 저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피정을 하기 전의 얼굴과 다음의 얼굴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습니다.
볼거리가 없었던 어린 시절 저는 누나가 사준
다이제스트 문학전집을 읽고 또 읽어 내용을 다 외울 정도로 읽었고
그 안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키우며 저를 성장시켰습니다.
이것이 한 편으로는 너무 좋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책이 없었던 것이 너무도 원이 되어
제가 조카들에게 책도 사주고 읽으라고 해도
그런데 조카들은 그렇게 좋은 책이 많아도 읽지를 않았습니다.
T.V를 비롯하여 재미있는 것, 유익한 것이 하도 많으니
有意味한 것의 홍수로
有意味의 無意味化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有意味의 洪水.
渴望 없음.
敬聽 없음.
生命 없음.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제 안에서 무정란이 되어
곯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되는 아침입니다.
방에 걸려 있는 하 멜키올 형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같이 살 때 생각이 났습니다.
오늘 복음의 여러 말씀 중에서 씨가 뿌려졌지만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마음에 꽂히면서
그의 생전에 카나리아를 키우던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멜키올 형제는 모든 동물을 잘 키우셨지만
특히 카나리아를 잘 키우셨습니다.
저는 카나리아를 키워 한 번도 새끼를 까지 못했는데
멜키올 형제는 1년 4-5차례 새끼를 까게 했습니다.
호저에 있는 우양의 집에 같이 살 때
이 양반이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담배를 입에 무는 것이고 다음 하는 것이 카나리아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카나리아를 키울 때 본 대로 먹이도 주고 관심도 기울였는데
제가 키운 카나리아들은 한 번도 새끼를 까지 않았습니다.
제가 키운 카나리아들도 알을 깠지만 새끼는 까지 못한 것입니다.
카나리아 암컷이 아무리 품고 있어도 새끼는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품고 있는 알이 무정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컷이 새장에 같이 있었는데도 왜 무정란이 되었는지
저는 지금도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밭에 떨어집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신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굴 찾아가느냐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명인데
누구 마음 밭에서는 주님의 말씀이 생명으로 자라고
또 누구 마음 밭에서는 말씀이 무정란처럼 생명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오래 전 저는 전남 장성의 한 시골에 가서 시골살이를 하였습니다.
낮에는 그곳 사람들과 똑같이 들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교리도 하고 미사도 드리는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그 생활을 마칠 무렵 소위 피정이라는 것을 하였습니다.
마땅히 피정을 할 만한 곳이 없어
초등학교 분교를 빌려 마룻바닥에 하루 종일 앉아
프로그램이랄 것도 없는 아주 엉성한 피정을 하였는데
제가 하는 얘기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스펀지처럼 쏙쏙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같은 내용의 강의를 서울에서 할 때는
더 좋은 장소에서
더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했는데도
신자들이 수채 구멍으로 그냥 흘려보낸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들에게는 저의 말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있음을,
말하자면 저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피정을 하기 전의 얼굴과 다음의 얼굴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습니다.
볼거리가 없었던 어린 시절 저는 누나가 사준
다이제스트 문학전집을 읽고 또 읽어 내용을 다 외울 정도로 읽었고
그 안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키우며 저를 성장시켰습니다.
이것이 한 편으로는 너무 좋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책이 없었던 것이 너무도 원이 되어
제가 조카들에게 책도 사주고 읽으라고 해도
그런데 조카들은 그렇게 좋은 책이 많아도 읽지를 않았습니다.
T.V를 비롯하여 재미있는 것, 유익한 것이 하도 많으니
有意味한 것의 홍수로
有意味의 無意味化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有意味의 洪水.
渴望 없음.
敬聽 없음.
生命 없음.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제 안에서 무정란이 되어
곯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되는 아침입니다.
신부님 오늘도 기쁜하루되세요~
성장 안에서 일상의 깨달음없는 반복으로
그 빛을 내지 못하는
나약한 지금의 저를 돌아보게 합니다.
인간 조건이 동일하고 말씀은 공평하게 주어지는데
신부님의 삶과 제 삶이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나는 것은
분명 제 탓이라 여기기에 제 자신과의 정직한 만남의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더 이상 무정란을 품고 있으면서 그것이 유정란 인줄 아는
어리석은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소중한 기도라 생각합니다.
말씀 안에서 나누어 주시니 더욱 그러하고요.
말씀이 오늘의 삶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청해보는 아침입니다.
나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