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의 사람은 누구이고 영의 사람은 누구일까?
세속적인 사람은 누구이고 거룩한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사람을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가를 수는 없는 것이지만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에 대해 일반론적으로 얘기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육의 사람은 이 세상의 욕망을 섬깁니다.
영의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갈망합니다.
육의 사람은 선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여 위선적입니다.
영의 사람은 선을 하느님 것으로 돌려드리고 솔직합니다.
육의 사람은 권력을 즐깁니다.
영의 사람은 봉사를 기뻐합니다.
육의 사람은 인위적이고 음모에 능합니다.
영의 사람은 순리적이고 화합에 능합니다.
이런 식으로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을 가를 수 있지만
오늘 복음에 비추어 얘기한다면
육의 사람은 자신의 필요에 남을 이용한다면
영의 사람은 타인의 필요에 자기를 내어줍니다.
어제는 피정중인 수녀님들을 면담해주다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사랑을 실천할 때 종종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다른 사람을 씻어주는 고백성사를 주다 내가 씻기는 체험을 하고,
남의 문제를 해결해주다 내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같은 거지요.
깨달음이란 더러운 것에 대한 네 가지 태도입니다.
손수 치우는 사람.
덮어버리는 사람.
피해버리는 사람.
더럽다고 화를 내는 사람.
잘못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비슷합니다.
화를 내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내고 비난하기 싫어 무관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선과 덕으로 잘못을 덮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겸손과 사랑으로 잘못을 고쳐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육의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취하지만
영의 사람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같이 아파하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그리고 마침내 그를 위해 뭔가를 합니다.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하고
그래서 병자는 의사의 "Raison d'e tre(존재이유)"이지만
세속적인 의사는 환자들에게서 명성과 이익을 얻으려 하고
영혼의 의사는 환자들이 영육으로 건강하도록 애를 씁니다.
세속적인 사람은 누구이고 거룩한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사람을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가를 수는 없는 것이지만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에 대해 일반론적으로 얘기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육의 사람은 이 세상의 욕망을 섬깁니다.
영의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갈망합니다.
육의 사람은 선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여 위선적입니다.
영의 사람은 선을 하느님 것으로 돌려드리고 솔직합니다.
육의 사람은 권력을 즐깁니다.
영의 사람은 봉사를 기뻐합니다.
육의 사람은 인위적이고 음모에 능합니다.
영의 사람은 순리적이고 화합에 능합니다.
이런 식으로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을 가를 수 있지만
오늘 복음에 비추어 얘기한다면
육의 사람은 자신의 필요에 남을 이용한다면
영의 사람은 타인의 필요에 자기를 내어줍니다.
어제는 피정중인 수녀님들을 면담해주다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사랑을 실천할 때 종종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다른 사람을 씻어주는 고백성사를 주다 내가 씻기는 체험을 하고,
남의 문제를 해결해주다 내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같은 거지요.
깨달음이란 더러운 것에 대한 네 가지 태도입니다.
손수 치우는 사람.
덮어버리는 사람.
피해버리는 사람.
더럽다고 화를 내는 사람.
잘못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비슷합니다.
화를 내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내고 비난하기 싫어 무관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선과 덕으로 잘못을 덮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겸손과 사랑으로 잘못을 고쳐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육의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취하지만
영의 사람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같이 아파하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그리고 마침내 그를 위해 뭔가를 합니다.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하고
그래서 병자는 의사의 "Raison d'e tre(존재이유)"이지만
세속적인 의사는 환자들에게서 명성과 이익을 얻으려 하고
영혼의 의사는 환자들이 영육으로 건강하도록 애를 씁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하여 태어 났느뇨 ?
천주님을 알아 공경 하고 자기 영혼을 구 하기 위해 태어 났습니다."
나의 존재 이유는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 나라를 그리워 하는 것 입니다.
양떼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며
새벽마다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신부님 모습이
착한 목자 주님을 꼭 닮으셨다고 느껴집니다^^
오늘 나눔의 말씀을 대하는 제 마음은
시험을 친 학생이 선생님께서 불러주시는 정답을 듣고
자신의 시험답안을 채점하는 학생의 떨리는 마음,
바로 그 심정이네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기회가 은총이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아직 살날이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하며,
인생이 다 지난 후에,
그 때는 미처 몰랐다는 때 늦은 후회에 눈물 흘리지 않도록 다시 시작하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