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지난 주일 하나원에 가서 새터민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강론 중에 한 가지를 아주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하나원을 나가면 다단계하는 사람들의 말을 절대로 믿지 말라고.
제가 대전에 있을 때 많은 새터민들이 이 다단계를 했습니다.
제가 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그들의 말이 얼마나 솔깃했는지 제 말을 듣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는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였던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뭘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왜 그랬을까요?
남을 속이기 위해서는 정말 그럴 듯해야겠지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서 금한 과실을 따먹은 것은
좋고 탐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 경험에서도 저를 실족케 한 유혹들은 많은 경우,
입에 달고
귀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냉큼 삼켜버립니다.
반대로 저를 성장케 하고 병든 저의 영혼을 치유한 것들은
입에 쓰고
정말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이었습니다.
마치 입에 쓴 약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하신 말씀들이 얼마나 솔깃합니까?
주님은 우릴 결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하는 분이시랍니다.
이 말만 보면 매우 솔깃한데,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날에 우리를 다시 살리시겠답니다.
마지막 날에야 다시 살리겠다는 것이 문제이고
마지막 날에야 다시 살리시겠다는 것은
지금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기에 문제입니다.
사실 오늘 주님께서 당신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지만
당신에게 오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도 하시지 않습니까?
이는 마치 강 건너편에 계시는 주님께 가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계시는 강 건너편에 가기만 하면
거기에는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문제는 강을 건너야 합니다.
죽음과 생명의 강입니다.
죽으면 사는 강입니다.
홍해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이 강을 건너셨습니다.
주님께서 강 건너편에서 손짓을 하십니다.
그러나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입니다.
가야 한다고 하나 언제 갈지 망설입니다.
마지막 날 살리겠다고 하시는데
그 마지막 날이 언제가 될지 두렵기도 합니다.
아무튼 주님은 오늘 생명 강 건너편에서 손짓을 하십니다.
가시렵니까?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지난 주일 하나원에 가서 새터민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강론 중에 한 가지를 아주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하나원을 나가면 다단계하는 사람들의 말을 절대로 믿지 말라고.
제가 대전에 있을 때 많은 새터민들이 이 다단계를 했습니다.
제가 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그들의 말이 얼마나 솔깃했는지 제 말을 듣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는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였던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뭘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왜 그랬을까요?
남을 속이기 위해서는 정말 그럴 듯해야겠지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서 금한 과실을 따먹은 것은
좋고 탐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 경험에서도 저를 실족케 한 유혹들은 많은 경우,
입에 달고
귀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냉큼 삼켜버립니다.
반대로 저를 성장케 하고 병든 저의 영혼을 치유한 것들은
입에 쓰고
정말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이었습니다.
마치 입에 쓴 약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하신 말씀들이 얼마나 솔깃합니까?
주님은 우릴 결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하는 분이시랍니다.
이 말만 보면 매우 솔깃한데,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날에 우리를 다시 살리시겠답니다.
마지막 날에야 다시 살리겠다는 것이 문제이고
마지막 날에야 다시 살리시겠다는 것은
지금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기에 문제입니다.
사실 오늘 주님께서 당신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지만
당신에게 오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도 하시지 않습니까?
이는 마치 강 건너편에 계시는 주님께 가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계시는 강 건너편에 가기만 하면
거기에는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문제는 강을 건너야 합니다.
죽음과 생명의 강입니다.
죽으면 사는 강입니다.
홍해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이 강을 건너셨습니다.
주님께서 강 건너편에서 손짓을 하십니다.
그러나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입니다.
가야 한다고 하나 언제 갈지 망설입니다.
마지막 날 살리겠다고 하시는데
그 마지막 날이 언제가 될지 두렵기도 합니다.
아무튼 주님은 오늘 생명 강 건너편에서 손짓을 하십니다.
가시렵니까?
우리가 몰라서 못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제 자신부터 정직하게 돌아보면 그래요.
이론적으로는 신앙인인지 모르지만
실천이 없다면 실천적 무신론자라고 말해야겠지요.
갈망하는 자 만이 성숙한다 하니
우리 함께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먼저 앞장서 가시는
분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가기로 해요.
마니또님!, 뭉게구름님!
고맙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손짓을 하는데도
멍청하고 용기가 없으니
죽음의 강을 바라만 보고
발 만 동동 거리고 있습니다.
김남주 시인의 詩...가사가 무척 좋지요?
제가 좋아하는 민중가요인데 오랫만에 들어봅니다^^
안치환씨 목소리가 들리네요.
노찾사보다는 안치환씨 노래로 들을 때 더 좋은것 같아요^^
신부님! 강을 건너 가고는 싶은데, 어떻게 건너야 하는지 몰라서요..ㅎㅎ
앞장서서 가시면 전 그냥 신부님 뒤따라 건너갈께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사랑 속에 형제 모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형제의 손잡고
가로 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 어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 어차 건너 주자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주고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
물음에 대한 답변이 되셨는지요?
주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하루같이 새벽을 일찍 여는 님들의 고단함과
독방의 고독이 존재하기에 우리가 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