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당신께 올 것이라는 말씀이고,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온 이, 즉 당신만 아버지를 봤기에
당신 외에는 아무도 직접 하느님을 뵙고
말씀을 듣고 배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풀이를 하면 이런 것이 되겠습니다.
1) 하느님을 직접 뵌 분은 예수님뿐이니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제일 잘 알고 전해 줄 분은 예수님이고
2)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당신께 온다고 하시니
예수님 말고도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존재가 있고
3) 그러므로 이런 존재 덕분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예수님께도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언표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계시이지만
예수님 말고도 하느님을 계시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구원의 보편성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널려있는 하느님의 표징들을 얘기한 바 있지만
해, 달, 별, 공기, 바람, 풀과 나무,
이 모든 것이 말은 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요즘 같은 봄에는 피어나는 꽃들이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느님에 대해 너무도 생생하게 전해 줍니다.
말 못하는 피조물들이 이러할 진데
신비를 감지하고 얘기하고 그릴 줄 아는 인간은
하느님 말씀의 더 완전한 전달자입니다.
공자가 그러하고
노자가 그러하고
석가가 그러하고
마호멧이 그러합니다.
솔직히 저는 한 때 복음과 성경보다도
불교서적과 노자의 글에 더 심취했었습니다.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 복음과 성경의 말씀이
석가나 노자의 말씀을 통해서 읽으니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석가나 노자의 말씀을 통해서 이해하니
얕고 협소했던 복음과 성경의 이해가 깊어지고 확장되었습니다.
노자의 말씀과 다른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노자의 말씀을 내포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렇잖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노자의 말씀을 담지 못한다고 한다면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녀 글라라는 유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프란치스코와
자기의 관계를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들에게 ‘길’이 되셨는데,
그분의 애인이요 모방자인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며 가르쳐주셨습니다.”
글라라는 프란치스코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갔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로 간 것입니다.
글라라에게 있어서 프란치스코는 길라잡이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수많은 길라잡이들이 있습니다.
또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길라잡이가 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통해서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이 되고
사람들은 우릴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당신께 올 것이라는 말씀이고,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온 이, 즉 당신만 아버지를 봤기에
당신 외에는 아무도 직접 하느님을 뵙고
말씀을 듣고 배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풀이를 하면 이런 것이 되겠습니다.
1) 하느님을 직접 뵌 분은 예수님뿐이니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제일 잘 알고 전해 줄 분은 예수님이고
2)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당신께 온다고 하시니
예수님 말고도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존재가 있고
3) 그러므로 이런 존재 덕분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예수님께도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언표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계시이지만
예수님 말고도 하느님을 계시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구원의 보편성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널려있는 하느님의 표징들을 얘기한 바 있지만
해, 달, 별, 공기, 바람, 풀과 나무,
이 모든 것이 말은 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요즘 같은 봄에는 피어나는 꽃들이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느님에 대해 너무도 생생하게 전해 줍니다.
말 못하는 피조물들이 이러할 진데
신비를 감지하고 얘기하고 그릴 줄 아는 인간은
하느님 말씀의 더 완전한 전달자입니다.
공자가 그러하고
노자가 그러하고
석가가 그러하고
마호멧이 그러합니다.
솔직히 저는 한 때 복음과 성경보다도
불교서적과 노자의 글에 더 심취했었습니다.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 복음과 성경의 말씀이
석가나 노자의 말씀을 통해서 읽으니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석가나 노자의 말씀을 통해서 이해하니
얕고 협소했던 복음과 성경의 이해가 깊어지고 확장되었습니다.
노자의 말씀과 다른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노자의 말씀을 내포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렇잖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노자의 말씀을 담지 못한다고 한다면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녀 글라라는 유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프란치스코와
자기의 관계를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들에게 ‘길’이 되셨는데,
그분의 애인이요 모방자인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며 가르쳐주셨습니다.”
글라라는 프란치스코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갔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로 간 것입니다.
글라라에게 있어서 프란치스코는 길라잡이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수많은 길라잡이들이 있습니다.
또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길라잡이가 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통해서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이 되고
사람들은 우릴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게 된다는 얘깁니다.
저는 저의 과거를 떠올리가 싫습니다. 그런데 자꾸 떠오릅니다. 대화하면서 저의 과거사를 잊어버리고 나의 주변을 나의 그늘에 가려진 무엇인가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감추어진 무엇인가를 발견하여
배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눈이 가려져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 뿐 입니다.
어제 빗방울에 길가에 떨어진
햐얀 벚꽃 잎에서도 하느님을 바라 봅니다.
제가 소설을 좀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리얼한 현실도 소화해 내기가 벅차고 생생한데
조작된 가공의 세계에서 감동받으며 울고불고 할 일 있나, 라는
좀 못된 생각이 있답니다.
헌데 오래 전에 읽었던 소설 중 동의보감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스승도 제자를 잘 만나야 하고 제자도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을
유희태와 허준의 만남을 떠올리며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승은 스승다운 면모를 갖추어야 하고
제자는 제자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요.
오늘날 스승이 없다고만 탓하지 말고 제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지
제 자신부터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