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초월자 앞에서
모든 선한 일에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보상을 기대하는 심리가 숨어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대가로 축복과 성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약속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믿는 이들은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실천하셨던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직장과 수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본성 안에 숨어 있는 기대심리는
내가 하느님께 잘해드리면 하느님도 내게 잘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신학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수없이 바친 기도와 희생, 돈과 재능에
하느님께서 현세의 복을 주실 것이라는 인과응보의 믿음은
바치지 않으면 안 주시는 옹졸한 하느님으로 만들고
잘못하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믿음은
상선벌악의 하느님으로 만든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은 차별과 제한을 두지 않으신다.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기름칠한 말
나는 해도 되고 너는 해서는 안 된다는 차별과 말살의 논리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만든 틀
그러한 논리로 사는 이들은 악한 세상과 선하신 하느님 사이에서
어떤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만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사랑이 없는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에 의지할 수 있을까?
세상의 논리로는 의인이 당하는 고난을 설명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수난과 골고타의 형장에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사실과
사랑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보여주셨다.
하느님과 연결된 삶에서 진실한 내면은 사랑하기 위해서 죽는다.
사랑과 선은 과정의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죽음이다.
살리기 위해 죽는 죽음이 생명을 가져오고
자신만 살겠다고 하다가 죽음에 직면한 이들도 있다.
사람들의 반응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은 끊임없는 감정의 기복에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아 지치고 만다.
기분이나 성취감으로 자신과 타인을 판단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그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기분이 좌우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행복하다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이나 본질적인 자유를 누릴 수 없다.
행복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론적 가치는 자신이 총명하다거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달린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살던 사람이라도
위대한 초월자이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될 때
진정한 나를 깨닫게 된다.
하느님 앞에 있는 인간이 인간 앞에 계신 하느님과 만날 때
멀리만 계시던 분이 곁에 계신 분으로 느끼게 되고
그분의 돌보심과 함께 계심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