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기에
어떤 고통도 겪지 않는다는 말은 맞는 말인가?
고통을 겪지 않는 인간이 없을뿐더러
의인들이 오히려 더 많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우리 사는 삶이니
이 말은 전혀 맞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의인이 고통을 더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지혜서는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어리석은 이나 고통을 고통으로 생각하지
지혜로운 이는 고통을 전혀 고통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고통만 보이고,
자기 혼자서 고통을 당하며,
아주 불행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고통은 곧 불행인 셈이고,
그들은 고통을 시련으로만 알고 단련인 줄 모르고,
사랑의 껴안음임은 아예 모릅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죽는 것이 끝으로만 알고 새로운 시작인 줄 모르고
이런 걸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이런 걸 아는 사람을 오히려 어리석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또한 오늘만 보고 내일의 오늘은 보지 못하며
이 세상만 알고 저 세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을 잘 안 순교자들은 이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분들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자랑하는 이 세상 지혜를 모욕하였기 때문이고,
그들의 어리석은 지혜를 허물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의 지혜가 이 세상 지혜와 다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천상의 지혜를 얼치기로 알고 있는 저의 지혜와도 다릅니다.
그것은 저의 지혜가 마음과 몸까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몸까지 도달하지 못한 지혜는 참 지혜라 할 수 없고
지식수준에 불과하다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순교자들은 지혜가 진정 마음에서부터 몸까지 도달했기에
고통이 단지 시련이 아니라는 걸 알 뿐 아니라 단련으로 달게 받고,
죽음이 새로운 시작이란 걸 알 뿐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103위 순교자들 중에는 아주 어린 성인도 있고
배운 것이 별로 없는 성인도 있지만 이러 하시기에
이 면에서 저는 순교자들 앞에 한껏 작아집니다.
만약 제가 하느님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면 죽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사를 놔서 편안하게 죽을 수 있다면
죽음이 그렇게 두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처럼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해야 하고,
각가지 고문과 수치스런 일을 당해야 한다면
저는 그런 일을 당하기 전에 배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랑스런 우리 순교 성인들의 축일을 지내는 오늘
순교의 지혜가 머리에서부터 마음과 몸에까지 가득하도록
불쌍한 저를 위해 순교 성인들께서 빌어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긴 시간 나자신과의싸움 얼치기 지혜로, 지금까지 인도 하신
주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셨기에 저를 끝 까지 붙드심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