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아무도”라는 말이 마음에 거슬립니다.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데
사실은 있기 때문이고, 어떤 때는 저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하지 않는 그런 일이 어찌 벌어집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불이 등불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는 않았겠지요.
그런데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제가 무슨 세상의 빛입니까? 저는 어둠입니다.”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빛을 어둠으로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까?
물론 겸손이 아니고 오히려 교만입니다.
물론 우리는 빛이 아니지요.
빛이신 분은 하느님이시니 빛이 아닌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심은
나의 빛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나의 빛을 비추라는 줄 알고 나에게는 빛이 없다고 한다면
너무도 당연한 하느님의 빛을 생각지 않는 것이고
그 빛을 비추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니
너무도 황당한 착각이고 교만인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고 할 때의 그 어둠은
하느님의 빛을 받지 않은 자의 어둠입니다.
우리는 태양의 달과 같이 빛이신 하느님의 빛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몇 년 전에도 한 번 한 적이 있는
회광반조(回(廻)光返照) 얘기를 다시 할까 합니다.
사전적인 뜻은 해가 지기 전 마지막으로 빛을 밝히는 것,
또는 꺼지기 전에 마지막 섬광을 터뜨리는 것을 말하지만
선불교에서 이 말은 빛을 안으로 돌려 내면을 비추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소화 자매 수녀회를 세우신 김 준호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얘기하십니다.
“달이 스스로 빛이 없지만
태양의 반조로 빛이 있음 같이
사람 스스로는 절대의 지혜와 자비가 없지만
하느님의 德을 채 받으면 지혜의 빛이 반조됩니다.
마치 지구 스스로의 열은 부족하여도
태양의 열을 받은 후에 만물의 생명을 길러낼 수 있음 같이
사람 스스로의 지혜와 자비만으로는 부족하여도
성스러운 임의 지혜를 받은 후에 諸德이 완성되어
천지로 더불어 양육하게 되나이다.
그러므로 자력의 德과 타력의 德을 합할 때
한 인격이 되나이다.
합심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해와 달 사이의 햇빛과 달빛 같이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덕도 똑 같이 완성하게 되나이다.
곧, 큰 빛과 작은 빛이 합할 때 그 빛이 완전해지나이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요한1)
그분을 통하여, 큰 빛과 작은 빛 하느님사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