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 주제는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지금 백성들이 흩어져 있다는 말씀인 것이고,
관건은 주님께서 어떻게 이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느냐 그 것입니다.
이에 대한 에제키엘 예언서의 예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당신 성전을 사람들 가운데,
곧 우리들 가운데 두시겠답니다.
이는 우리의 생각이나 예상과 다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을 산 꼭데기에 세우고
사람들이 그리로 찾아오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어서 하느님을 찾아
스스로 산 꼭데기까지 오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랬으면 흩어지지도 않았을 테지요?
문제는 사람들 손이 깨끗하거나 마음이 정하지도 않고,
정신이 헛 군데에 가 있어 그것을 찾아 흩어진 겁니다.
그러니 모이라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모으기 위해 몸소 찾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이것이고,
한 곳에 계시지 않고 공생활 내내 돌아다니신 이유가 이것이며,
주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신 이유가 이것이고,
프란치스코에게 "가서, 나의 집을 고치라"고 하신 이유도 이것이지요.
오늘 에제키엘서 말씀처럼 찾아가는 교회,
사람들 가운데 있는 성전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프란치스칸 은둔소들이 다른 운둔소들과 달리 마음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위치한다는 것이고, 우리나라는 좀 다르지만, 클라라 수녀원들이
다른 봉쇄 관상 수녀원들과 달리 마을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고 사람들 가운데로 가는 것이고,
아니, 아예 살아있는 복음들로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복음화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살아있는 복음이 되려면 오늘 복음의 예언처럼
희생양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http://www.ofmkorea.org/334009
19년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좋은 패, 나쁜 패 다 쓰시는 하느님)
http://www.ofmkorea.org/207579
15년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우리도 가야파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http://www.ofmkorea.org/76443
14년 사순 제5주간 토요일
(모임과 흩어짐)
http://www.ofmkorea.org/61390
12년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악을 통해서도 선을)
http://www.ofmkorea.org/5676
10년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
http://www.ofmkorea.org/3828
09년 사순 제5주간 토요일
(하나로!)
http://www.ofmkorea.org/2331